설교

새로운 기쁨이신 그리스도 (마 9:9~17)

따뜻한 진리 2018. 1. 7. 21:41

마태복음 9:9~1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저자 마태는 본문에서 잠시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말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따르기 전 세금을 거두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로마제국이 다스리던 각 지방에서 세금을 거두기 위해 세운 그 지역의 현지인이나 로마인입니다. 세리가 이방 로마제국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과 로마가 요구하는 세금보다 더 거둔다는 사실로 인해 유대인들은 세리를 죄인 취급했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지나시다가 세리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고, 예수님은 그의 집에서 여러 세리들, 죄인들과 식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죄인들과 식사를 하시는 모습에 대해 질문하는 자들이 두 번 등장합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죄인들과 왜 함께 식사하느냐고 그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한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성경 말씀의 뜻을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건강한 자에게 의사가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모든 인간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 모두가 죄의 병이 든 자이기 때문에 그 병을 고치실 의사이신 예수님이 모두에게 필요로 해야 하지만, 모두가 자신의 죄인 된 것을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모두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하고 따라야 하지만 죄인들만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하고 따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병든 죄인임을 아는 자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물론 자신들이 죄가 없는 완벽한 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용서가 필요한 참혹한 죄인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런 자신들의 실상을 알았더라면 다른 죄인들을 지나치게 미워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헛된 제사를 드려온 자들, 즉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알지 못하는 자는 다른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지도 못합니다(13). 물론 유대인들이 율법을 근거로 세리나 죄인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했던 것처럼, 우리도 법과 도덕에 따라 큰 죄를 지은 자들을 미워하고, 처벌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나 우리나 큰 차이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가 미워하는 죄인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이 죄를 뉘우치고 용서하시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들과 잔치를 하신다면 우리는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같은 죄인이고, 예수님이 필요한 병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과 식사를 하시던 예수님께 질문한 두 번째 사람들은 바로 세례요한을 추종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식을 안 하냐고 질문했습니다. 이들은 앞에서 질문한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세례요한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어느 정도 인식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하신 것에 대해서는 문제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금식해야 할 때에 금식하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죄를 정직하게 해결하기 위해서 금식을 하고 애통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금식을 하지 않으시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죄인들이 누리던 기쁨의 교제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세례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알았지만 예수님이 그 죄를 해결하는 주인이심을 알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 때문에 이 땅에 오셔서 눈앞에 마주하고 계신 구속자를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죄로부터의 자유와 기쁨, 그리고 예수님 자체의 영광을 깨닫지 못하니 금식을 하면서 자기 죄를 슬퍼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랑인 자신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자기가 죄인인 줄 아는 자들과 제자들이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고, 나중에 자신이 십자가에 달릴 때 그들이 슬퍼하면서 금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 비유를 더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낡은 옷에 새 천조각을 덧대어 깁는 것과 새포도주와 부대를 모두 보전하는 비유입니다. 낡은 옷은 신축성이 없어서 새 천조각이 당겨지면 더 뜯어질 것입니다. 또 한창 발효 중인 새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으면 부대의 신축성이 떨어져서 부풀다가 터질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세례요한의 사람들은 자기를 기준으로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자신의 일부를 수정해서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주시는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새 옷을 우리가 입으려면 헌 옷은 버려야 하고, 새 포도주를 담아내려면 완전히 새로운 가죽부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적당히 자기 것을 고수하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어떤 것을 인정받으려 하면서 예수님을 의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라는 새 옷과 새 포도주가 버려지지 않고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리스도의 피를 마실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이 죄인인 줄 알아야 가능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추셔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추악한 죄인인 줄 알게 될 때, 우리가 쌓아온 어떤 공로나 착함이나 떳떳하게 지켜온 양심도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으로 인정받을 것이 없음을 알고 절망할 때 예수님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암 진단을 받은 환자에게 자기 경력과 재물과 도덕성이 중요합니까? 그에게 중요한 것은 능력을 가진 의사 뿐입니다. 우리가 멸망할 죄인인 줄 알게 될 때 의사이신 주님 외에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 말종이라고 여기는 나쁜 죄인들과 내가 본질상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게 된 자는 주님만 바라보며 기다리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마침내 자신을 부르실 때 어떤 주저함도 없이 따르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에게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마태의 심령 가운데 죄인으로서의 각성을 일으키시고,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고 명령하시는 분의 말씀이 그를 움직이셨기에 그분의 제자가 된 것을 마태가 우리에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살수록 다른 것으로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고, 죄인인 줄 알고, 스스로에게 가망이 없는 줄을 알게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를 고치실 수 있고, 새롭게 하실 수 있고, 하나님 나라로 이끄실 유일한 분이심을 알게 되어 주님만 간절히 바라보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