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마라의 쓴 물 (출 15:22-27)

따뜻한 진리 2018. 11. 4. 21:36

출애굽기 15:22-2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이스라엘은 홍해를 지나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광야는 뜨거운 열기로 메마르고,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쉽게 구할 수 없는 곳입니다. 음식과 물을 구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곳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사막, 광야에 집을 짓고 살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광야는 지나가고 싶은 곳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광야에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22절을 보면 이스라엘은 수르광야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사흘 동안 걸었지만 물을 얻지 못했고, 거기서 더 가다가 마침내 물을 발견했지만 백성들은 그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리고 맛이 쓰다는 뜻으로 그 물이 있는 곳을 마라라고 불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셨고, 모세는 그 나무를 물에 던졌는데 물이 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지켜야 할, 순종해야 할 것들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면 애굽 사람들처럼 화를 입지는 않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자신이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백성을 광야로 들여보내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시련을 통해 사람의 약함과 자기들 스스로 고칠 수 없는 문제들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백성들은 불평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에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백성들을 참으시고, 필요한 것을 주셔서 그들을 지키고 보존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구출되었고, 애굽 군대가 몰살당한 홍해에서 건짐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아직 잘 몰랐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갔는데, 그 과정에서 백성들은 연약함과 어리석음과 패역함을 하나님께 드러내었고, 하나님은 그런 백성들에게 인내와 강함과 지혜와 성실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백성들은 악을 드러내는 데 하나님은 선을 베푸셨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을 깨달았고,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가 믿을 수 있는 것임을, 유익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자신들을 사랑하시고 책임지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따라가면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광야생활의 시작부분인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생존에 필수적인 물을 가지고 연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는 나일강물을 피로 변하게 하셔서 물을 마실 수 없게 하셨는데, 이번에는 자기 백성들이 물 때문에 고통을 겪게 하셨습니다. 앞에서는 홍해라는 거대한 물, 사람을 덮칠 많은 물을 백성들이 통과했지만, 이제는 입으로 들이킬 마실 물이 없어서 고생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물이 자신들을 침범하지 못하게 거리를 두실 수 있는 분임을 경험했었고, 이제는 필요한 물을 가까이 두실 수 있는 분임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물이 쓴 물임을 알고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단지 물이 쓰다는 것만이 불평의 이유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인도하신다고 하는데, 뭔가 만족할 만한 좋은 것들이 계속되지 않으니 불만스러웠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놀랄만한 것만 보여주시지 않고, 힘들고 고통스런 순간도 허락하시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겪은 광야는 구원받은 자의 삶을 잘 말해줍니다. 출애굽이 좋은 것인 줄 알았는데, 광야에서 쓴 맛을 보는 것으로 시작된 것처럼 구원받은 자의 삶은 광야를 지나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홍해를 지난 후 모세와 미리암과 함께 찬양을 했지만 며칠 되지 않아 불평을 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길들여진 사고와 습관을 기초로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고, 광야생활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생활이 환난임을 예상해야 했습니다. 성도 역시 구원 받은 이후 환란을 예상해야 합니다. 세속적 구원, 거짓 구원, 기복적 구원을 바라면서 신앙생활 하는 자는 예수를 믿어서 자기가 세상의 복을 많이 받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이전에는 좋았던 세상이 예수 믿은 후 광야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는 감격스럽고 놀라웠지만 곧 어려운 현실에 부딪힙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종살이 했던 이집트나 고생스런 광야나 두 장소 모두 자연환경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굽이 더 잘 갖춰진 곳입니다. 종살이하면서 바로만 잘 섬겼으면 편할 수 있었습니다. 광야라는 환경에서 편하게 살려면 애굽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것이 나았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이나 믿게 된 후나 세상은 변한 것이 없는데, 이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죄를 보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가면서 세상은 광야가 됩니다. 이전에는 달콤한 곳이었는데, 이제는 쓴맛을 보게 됩니다. 성도는 그 쓴 물을 예상하고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구원받기 이전의 가치관과 감각이 지배하고 있다면 광야가 주는 고통이 의심과 원망을 만들어 낼 수 있으나 거듭난 자에게 광야는 복을 얻는 장소요 시간이 됩니다. 고통이 있지만 은혜를 경험하는 신비로운 장소가 됩니다. 하나님과 긴밀하게 동행하고, 바꾸심, 채우심의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각을 위해, 생존을 위해 쓴물을 달게 바꾸어 주셨으나 정작 바뀌어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쓴 물을 달게 바꾸신 후 26절에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말 바뀌어야 할 것은 물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바뀌고 치료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설교자는 마라의 쓴 물을 달게 만든 나무를, 나무에 달린 예수님의 예표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바뀔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예수님이 사람을 그렇게 바꾸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치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바뀐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광야 같은 세상, 광야보다 더 고통스럽게 하는 세상, 쓰디쓴 물보다 더 고통스런 순간을 담담히 지나갔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찬양했고,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감사했고, 여러 핍박과 위협 속에서도 기쁨과 소망을 드러냈습니다. 누구보다 예수님께서 광야보다 더한 고난의 삶을 불평 없이 사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물이 쓰다고 원망했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기 위해 죄의 잔, 고통의 잔, 쓴 잔을 드셨습니다.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얻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복음이 귀에 들리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고 있고, 하나님이 나를 신실하게 인도하시는 주인임을 알지만 여전한 불신과 욕심으로 살아가고 있고, 죄인의 성향을 이길 수 없는 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는 복음이 합당하지 않은 죄인에게 주어지는 과분한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감히 받아들이고 누리기에는 부끄러운,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식적으로 죄인인줄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죄인인줄 알 때에 복음이 우리 영혼에게 생명으로 전달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쓴 맛을 보게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이 쓴 물과 같은 죄인입니다. 쓴 물과 같은 것이 자신임을 알 때에 하나님의 치료의 능력, 변화시키시는 능력이 정말 필요한 것은 자신임을 인정하고 순종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