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전도서 (8) (전 9:1-12)

따뜻한 진리 2019. 9. 29. 10:24

전도서 9:1-1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전도자는 지혜를 이야기 하면서 반복 강조한 것이 있는데, 하나는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잘 먹고, 성실히 일하는 것입니다. 먼저 죽음은 인간이 지혜를 얻기 위해 생각해야 할 가장 기초적인 사실입니다. 전도자는 115-16, 215, 318-22, 본문 91-6절에서 동물이나 사람이나,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나,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모두가 죽음을 맞이한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전도서 전체에서 죽음을 바탕에 깔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인생에서 만나는 일들을 바르게 인식하고, 바르게 대처하기 위해 반드시 전제해야 할 사실입니다. 사는 동안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지킬 수 없고, 가져갈 수 없게 하는 죽음은 우리가 어리석은 판단, 어리석은 고민, 어리석은 분노, 어리석은 시도, 어리석은 희망을 내려놓게 합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 인간은 짧은 인생에 헛된 고통을 더하지 않고, 기쁨을 좀 더 누리게 해줍니다.

 

    그리고 전도자가 계속 반복한 두 번째 내용 잘 먹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은 그가 깨달은 지혜를 실천. 적용하는 것입니다. 224, 313, 322, 518, 815, 그리고 본문 97-12절에서 전도자가 공통적으로, 반복적으로 한 말은 고생스런 인생 속에서 사람이 먹고 마시며 성실하게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죽음의 한계 아래 두시고, 대단한 것을 추구하기 보다는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수고하고 일하면서 잘 먹고 쉬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인간의 지혜를 추구하면서 저지르는 착각, 교만을 버리게 하고, 유익함을 실제로 얻을 수 있는 지혜로써 수고하고, 먹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 두 가지 즐거움은 겸손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이 지혜의 시작이자 실천입니다. 그 지혜는 사람이 통제하고 예상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 지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신뢰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이 찾는 지혜는 자기가 예상한대로 결과를 얻는 것, 미래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 통계, 권선징악, 인과응보 같은 것이 세상 이치이고 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잘 되거나 망하는 이유를 그런 기준에 따라 해석합니다. 물론 그런 원리가 유효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들이 인간의 예상대로 항상 작동되지는 않게 하십니다. 인간들은 욥의 친구들이 욥의 고난을 이해한 것처럼 그렇게 평가하고, 그런 원리에 따라 고난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런 원리에 따라 고통이 없으면 자기가 그럴 듯하게 잘 살고 있다고 만족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징벌하시고, 의로운 자를 붙드시는 분이시지만 하나님 없이 자기 의를 자랑하고, 자기가 착하고 성실한 자라고 만족하는 인간들을 무너뜨리십니다. 전도자는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그런 거짓된 지혜를 깨뜨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도자가 자기 이야기를 통해 불신자들에게만 교훈을 주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전도자가 말하는 인생의 부조리와 죽음 아래서의 허무가 불신자들에게만 경고하는 것이지 신자들에게는 무관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불신자들의 지혜뿐만 아니라 거짓 신앙도 깨뜨렸습니다. 그는 2절에서 말하듯 제사 드리는 자나 안 드리는 자, 즉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복과 고난과 죽음이 무차별적으로 허락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의 삶에도 예상대로 되지 않는 일, 착한만큼 보상받지 못하는 일,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고난도 겪게 하십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목사들은 신앙이 그런 고통들을 막아 줄 수 있는 것처럼 왜곡합니다, 전도자는 분명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성경 전체가 신실한 성도의 고난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보여주십니다. 전도자는 성도일지라도 자기 지혜와 자기 공로로 세상에 대단한 것을 남기거나 숭고한 의미를 남길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성경 속 탁월한 인물들도 자신의 삶에 대해 그렇게 평가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한 일들을 가치 없게 여기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만을 소망했습니다.

 

    불신자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그런 인간의 한계를 무시하거나, 극복하려고 하거나, 조롱하는 듯 더 간사하고 악하게 살거나 할 것입니다. 전도자의 조언처럼 불신자들도 자기 일에 성실할 수 있지만 그것은 자기 공로를 신뢰하는 어리석음이고, 그들도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지만 허무함을 회피하기 위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 사람들이 결국 직면할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순간의 쾌락에 빠지는 것과 달리 성도가 순간 순간 성실하고 순간 순간 누리는 것은 우리 자신이 영원한 것을 통제할 수 없는 순간적인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위여야 합니다. 그것은 쾌락이 아니라 나 같은 순간적인 존재를 돌보시고,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희락이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실하게 일하는 것과 음식을 누리는 것은 창세기 3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 하나님께서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고 음식의 내용으로 저주의 말씀하셨습니다. 그 저주는 단지 죄인이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비극적인 판결이 아닙니다.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 모든 것이 뒤틀리고, 세상이 고통과 허무에 둘러싸이게 되었어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속 수고에 대한 대가와 만족을 일시적이지만 허락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인생 중에 아무리 수고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음식은 입에서 목구멍 넘어가는 동안 잠시 만족을 주지만, 그 일과 음식을 즐기는 것은 죄인에게 그런 한계를 정하신 하나님이 옳으시고 선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겸손히 의존하는 방법입니다. 전도자는 인간이 스스로 똑똑한 줄 알고 행복을 추구하지만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에게 선고하신 저주 속에 담긴 은혜를 누리는 것을 넘을 수 없다는 이해를 가지고 일과 음식을 말했을 것입니다.

 

    전도자는 그렇게 우리가 살면서 추구하는 것들에서 의미와 업적을 남길 수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그러나 현실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맡기신 나의 의무들, 학업과 가정을 돌보는 일과 직장 일과 가족을 책임지는 일과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교회를 섬기는 일들에 하루하루 성실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나의 인생에 무엇을 남길 수 있는가가 우리의 최종 관심이 아니라 우리의 그런 성실한 삶이 우리가 다 예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실해야 합니다. 먹고 나면 배설될 음식이지만 몸에 좋게 맛있게 만들어야 하고, 언젠가 폐기될 물건이라도 튼튼하게 만들어야 하고, 인생에 몇 번 쓸 것 같지 않은 영어단어와 수학 공식이지만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현재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감사하고, 그것을 즐겁게 누릴 것입니다. 주신 음식을 감사히 먹고, 주신 일들을 즐거이 감당할 것입니다. 지금 주신 소박한 음식, 공부할 수 있는 기회와 배워야 할 내용들, 힘들지만 일할 수 있는 직장과 땀 흘릴 기회가 항상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좋은 것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좋은 것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임을 알고 충분하게 누릴 때, 그 속에서 수고할 때, 그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감사가 견고해질 때, 앞으로 언젠가 겪게 하실 수 있는 쓰디쓴 고난 속에서도 선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과 지혜로 허락하신 것임을 알고 겸손히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