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누가복음 강해 (27) 누가복음 16:19-31

따뜻한 진리 2022. 1. 30. 23:22

누가복음 16:19-3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누가 봐도 좋게 보이는 고급 옷을 입고 날마다 풍족하게 즐기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의 집 앞에는 나사로라는 거지가 살았습니다, 그의 음식은 부자들이 먹고 남은 것이었고, 그의 친구라고는 헐고 짓무른 피부를 핥아주는 거리의 개들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된 삶을 살던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으로 묘사된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부자도 결국 죽었는데, 지옥에 갔습니다. 부자는 지옥의 괴로움을 겪던 중에 저 멀리 천국에 거지였던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부탁했습니다. 나사로의 손에 물 한 방울만 적셔서 자신의 혀를 시원하게 해달라고, 그리고 아직 땅에 살고 있는 자기 가족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서 자기처럼 지옥에 오지 않게 좀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자의 부탁들 중 어느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부자가 있는 지옥과 나사로가 있는 천국은 서로 오갈 수 없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땅에 있는 자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 즉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변화되어야지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말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이야기는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 속에 나타나는 사후 세계에 대한 묘사는 전부 다 사실, 실제인 것처럼 해석할 수 없습니다. 천국에 있는 자들이 다 아브라함 품에 안겨 있는 것도 아니고, 부자가 천국을 눈으로 목격했듯이 천국과 지옥에 있는 자들이 서로를 볼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듣는 자들이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에 생생한 이미지를 그리고, 충격을 받아 교훈을 얻도록 의도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유 속에 나타나는 내용들로 천국과 지옥을 상상해서는 안 되고, 성경 전체가 말하는 것들을 종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해할 소지가 많은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깨달아야 할 분명한 요소들은 바로 이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가 죽었듯 인간 모두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또 천국과 지옥에 한 번 들어가면 더는 처지를 바꿀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의 삶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고 이후에는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부자가 살아있는 동안 나사로에 대해 잘못을 했다는 것입니다. 부자의 문제가 어떤 것인지는 나사로를 안고 있는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부자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렸으니 이제는 지옥에서 고통을 겪고,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온갖 괴로움을 겪었으니 천국에서 위로를 얻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아브라함이 말한 내용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부자로 살면 모두 지옥에 간다거나,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 천국에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많이 도와주고, 착한 일을 많이 해야 천국 간다는 것도 아닙니다. 또 예수님을 안 믿어도 그냥 가난하기만 하면 천국 간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 비유는 본문 앞에서 계속된 예수님의 말씀들, 비유와 연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잃어버린 것들을 찾는 자의 비유,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롭게 일해서 칭찬받은 비유를 어떤 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까? 바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잘 아는 것 같고, 하나님 말씀, 율법의 전문가들 같지만 정작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죄인들, 소외된 자들을 살려내는 사역을 하지는 않고, 다른 것에 관심이 많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돈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그렇게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지만,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돈에 욕심을 가진 그들을 향해 계속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비유는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모세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바르게 이해했다면 율법을 사람들 보기에 그럴듯하게 지키는 척해서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십계명과 같은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하신 성품을 담고 있는 것이지만 죄인인 인간은 이 율법을 지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인간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미워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을 율법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 때문에 슬퍼하고 절망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구원의 길에 겸손히 순종해야 합니다. 율법이 죄인에게 구원자를 의지하고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달아나 스스로 행복을 찾으려고 해봐야 더욱 비참해지고, 영원한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길, 구원자를 믿고 순종하지 않으려 하고, 사람의 지혜와 힘을 합쳐서 해보겠다고 하면 멸망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보여준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구약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면서 그분에게 소망을 두었습니다. 본문 비유 속 아브라함이 모세와 예언자들에게 듣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이 그 뜻입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그 구원자가 바로 앞에 계셨는데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믿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이 상종도 하기 싫어하는 죄인들을 예수님이 품어주시자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을 가르쳤지만 자신들이 혐오하는 죄인들과 자신들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다른 죄인들과 자기들은 다르다고 차별화하면서 거룩한 척했을 뿐입니다. 또 그들은 진짜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에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구약의 율법이 가리킨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구약의 율법이 가르친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지식과 권력으로 돈을 벌었고,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로 스스로 누구인지를 드러낸 것임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 율법에는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를 대신 처리해줄 구속자를 의지해야 한다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핵심이 이스라엘에 주어진 상세한 법들에 그대로 녹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 고아와 과부 같은 소외된 자들을 돌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종교지도자들처럼 죄인들을 그냥 미워하고, 차별하고,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바로잡고, 긍휼히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참회할 기회를 주기 위해 그 죄를 다루고 처리하는 다양한 규정들도 주셨습니다. 누군가의 죄를 단순히 정죄하는 것을 끝내지 않고, 공동체적으로 비참해하고, 죄에 대해 무서워하고, 함께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새로워지길 구하는 제사 방식과 처리 방식들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자신이 비참함을 깨달은 자라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고 경험하는 자라면, 다른 죄인들에게도 그 하나님을 알게 하고, 돌보고, 그들에게 은혜 베푸는 것은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복음을 깨닫고 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차별하고 나눴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지위를 이용해서 돈을 벌었고, 그 돈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러기 쉽습니다. 비유 속 나쁜 탕자 동생을 쉽게 받아주는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긴 형처럼, 악한 죄인들을 그냥 받아주시고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을 위험하게 본 종교지도자들처럼 우리도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는 거저 구원을 받았고, 우리가 노력한 것 이상으로 풍족한 은혜를 누리지만 남들에게는 복음에 조건을 달고, 베푸는 일에 조건을 달기 쉽습니다. 이런 이런 죄를 짓는 사람들은 쉽게 안 변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파격적으로 용서를 베풀 수 있지, 가난한 사람들은 도와줘봤자 계속 게으르던데 그럼 도와주는 것이 낭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기 쉽습니다. 물론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악용하는 자들,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또 남들에게 받은 도움을 악용해서 받은 것을 소중히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흥청망청 쓰고, 성실하게 자립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또 돕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우려하는 그 일, 사람들이 복음을 믿는다면서도 여전히 죄를 즐거워하는 것, 물질적으로 도와줘도 성실해지려는 의지가 없는 그런 태도가 사실 나한테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저 구원하신 이유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아니고는 우리에게 가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다른 일들에는 능력을 발휘하고 열심을 내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감각도 없고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마음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일에 게으르고, 무력하고, 병든 거지와 같습니다. 그렇게 무능하고 가망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조건 없이 구원해 주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같은 자에게 실망하지 않으시고, 계속 영적인 복과 물질적인 복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구원을 취소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고 있으니 우리도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할 복음과 물질을 낭비할 것 같은 위험한 죄인들에게도 영적으로 복된 소식을 전하고, 물질적으로 도움도 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