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에베소서 강해 23 에베소서 2:4-7 (3)

따뜻한 진리 2024. 2. 4. 19:38

에베소서 2:4-7 (3)            김영제 목사(하늘기쁨교회)

 

    사람이 가장 존귀하게 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나는 소중한 존재구나’라를 것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돈을 많이 벌어서 그것을 사용할 때 내가 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까? 물론 우리가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이용할 때 비싼 것일 수록 그것을 파는 사람은 우리를 귀한 손님으로 대합니다. 수천 만원짜리 명품이나 자동차를 파는 곳에 간다면 손님을 다르게 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 사람이 진정 나를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내는 돈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돈을 쓸 때 왜 자신에게 친절한지를 잘 압니다. 그래서 때로 어떤 사람은 자기가 낸 비용만큼 자기가 특별한 대접을 받고 싶다는 마음에 갑질을 하기도 하고, 진상을 부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돈을 쓰는데 당신은 이것 밖에 못해’‘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돈 때문에 내가 귀하게 인정받는 것은 진짜 귀하게 여겨지는 것일까요? 사실은 더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돈이 아니라면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면 내가 귀중한 존재라고 여겨집니까? 그렇습니다. 사랑 받는 자만 자신을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도 자신을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희생할 때 자기 스스로를 의미 있고, 존귀한 자로 여기게 됩니다. 남녀 간에서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그것을 더욱 경험합니다. 그래서 아기에게 사랑을 쏟는 부모는 자기가 수고하면서도 아기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경험합니다. 행복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랑스럽던 자녀도 변하기 때문입니다. 남녀 관계의 사랑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 자녀 사이의 사랑도 변합니다. 어느 순간 자녀를 통해 내가 가치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고독해지는 때가 옵니다. 남녀간이든, 부모 자녀간이든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인정할 줄 모르면 집착하고 매달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 자기 삶의 의미를 느끼려고만 할 때 그렇게 됩니다. 또 아무도 나를 귀하게 여겨주지 않는 노년에는 자신을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에게 속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소중하게 만들어 주는 대상, 삶의 의미를 주는 대상을 찾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존귀하게 여김받고 싶습니다. 나를 기억하게 하려고, 무시하지 않게 하려고 열심히 삽니다. 업적과 이름을 남기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 노력이 진정 그리고 영원히 우리를 존귀하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가장 존귀하게 되는 길은 하나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하는 것입니다. 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히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것으로 여겨주시는 그 연합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 죄를 해결 받게 하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갑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는 이유, 그리스도에 속하게 하신 목적이 하늘에 속하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6절을 보면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앉히셨으니’가 바른 번역입니다. 바울은 5절부터 ‘살리셨다’. ‘일으키셨다’. ‘앉히셨다’라고 중요 동사를 동일하게 이미 이뤄진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구원하실 성도, 믿는 자의 죄를 없애시고, 생명 주셔서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시는 것을 조금씩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셨다고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하늘에 속하게 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것을 약속하신 분이 먼저 그것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다시 살리셨고, 자신의 왕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사도신경을 통해 항상 고백하고 있습니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가 그 내용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람들이 죽인 예수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가르치신 내용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시려고 부활시키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수치스럽게 하고, 비참하게 했지만 아버지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만 영광스럽게 하시지 않고,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으신 방법대로 우리도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에 불과한, 죄인이었던 우리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세상 가운데 높이 들어 올리시고, 죄로 물든 이 세상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아들 예수를 하늘로 높이신 것을 보이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도 하늘에 속하게 하셔서 높이실 것을 믿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서 오신 분이고, 하늘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1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또 요한복음 6장 38절에서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계시다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거기 계시던 분이 자신이 그곳에서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부활하셔서 다시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혼자 가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는 자들, 구원 얻은 자들도 그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2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라고 말씀하셨고, 누가복음 10장 20절에서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14장 2절을 보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가복음 23장 43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가 믿고 의지할 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하늘의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하나님 나라가 보이지 않고, 우리 몸은 이 죄 많은 세상의 현실에 속해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이미 속해 있습니다. 어떤 나라에 전쟁이나 중대한 위기가 발생하면 국력이 괜찮은 나라들은 그 나라에 전용기를 보내서 자기 국민들을 철수시키지 않습니까? 여러 선진국들을 비롯한 우리 나라도 그렇게 합니다. 또 전쟁 중에 죽은 병사 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찾아서 본국으로 송환시키려 합니다. 당사자나 지켜보는 사람들이나 내가 이 나라 국민인 것이 자랑스럽다, 내가 소중한 존재로 여김받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자신의 나라에 우리를 앉히신 것은 그런 것들보다 더 탁월한 복과 안전함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이 세상 나라들은 언젠가 사라지지만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죽음, 세상의 종말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하늘에 속하게 하신 것은 우리가 얼마나 귀한 자들인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에 의해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자, 하늘에 속한 자는 돈이나 권력으로 귀한 대접을 받으려는 어리석은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또 내가 사랑하는 자가 나의 사랑과 수고를 몰라주고, 마음이 변했고, 태도가 달라졌어도 인내하며 사랑하고 섬길 것입니다. 내가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내가 존귀하게 여김받기 위해 매달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 존귀하게 여김 받는 자신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