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대가가 따르는 용서 (출 32:15-35)

따뜻한 진리 2019. 2. 3. 23:09

출애굽기 32:15-35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이스라엘 백성들이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멸하려 하셨습니다. 모세의 부탁으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 대한 진노를 거두셨습니다. 모세는 십계명 돌판을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춤추는 모습을 본 모세는 첫 번째로 손에 들고 있던 십계명 돌판을 산 아래로 내던졌습니다. 그 돌판은 부서졌습니다. 십계명 돌판을 깨뜨린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깨졌다는 것입니다. 그런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가 담긴 말씀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백성 삼아주시고, 언약으로 그 관계를 맺으시고, 백성 다운 삶을 살도록 주신 계명이 그들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모세는 황금 송아지 우상을 불살라 부수어 가루로 만들고 물에 타서 백성들이 마시게 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자신들이 만든 우상을 처참하게 만든 후 그것을 삼켜, 자신들이 한 짓이 어리석고 모욕적인 일임을 깨닫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모세는 아론을 꾸짖습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이 백성이 당신에게 어떻게 했기에 당신이 그들을 큰 죄에 빠지게 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아론은 모세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 백성들이 불안했고, 자기는 모은 금을 단지 불에 던져 넣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아론은 책임을 백성들의 악함과 금송아지를 만들어 낸 불에 돌렸습니다. 네 번째로 모세는 레위인들을 시켜서 우상숭배에 가담한 삼천 명의 백성들을 죽이게 합니다. 다섯 번째 모세는 다시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라면 자신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면서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려 했는데, 정작 자신은 산 아래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직접 보고 진노를 쏟았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이런 태도에 의문을 품게 됩니다. 분명 모세가 하나님께 이스라엘에 대한 용서를 구했는데, 왜 이제 와서 돌판을 깨뜨리고, 삼천 명을 죽이고, 다시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을까요? 그 이유는 먼저 모세의 중보자로서의 역할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양측을 위한 중보자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변호인으로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지만, 하나님의 대변자로서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모두 인정해드렸고,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을 모두 드러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행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진멸, 전멸시키지 않기로 하셨으나 우상숭배에 대해 그냥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기로 하신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판단기준으로는 우상숭배에 직접 관여한 자들과 방조한 자들 전체가 죽임당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일부만, 아마 직접 관여한 패역한 자들만 모세를 통해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아론의 뻔뻔한 태도가 말해주듯, 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숭배한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않는 악한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들은 애굽에서 불순종한 자들이 어떻게 죽는지를 봤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스르는 자들로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 악한 자들을 죽여야 했고, 또 죽는 것을 봤던 백성들은 죄 앞에서 애굽이나 자신들이나 동일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를 푸셨지만 그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용서가 아무렇게나 베풀어지는 것은 결코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그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모세가 행한 일은 죄를 정당하게 다루는 공의로운 일로써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동시에 그것이야 말로 백성들을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전체가 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구원의 기회를 얻게 할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을 동시에 나타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런 두려운 일들을 행한 후에 다시 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여전히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사랑하심을 베푸시길 원한 것입니다. 백성들을 무섭게 다루었지만 여전히 사랑한 것입니다.

 

    모세가 보여준 거룩과 사랑의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만족시키고자 우상숭배자들을 처단한 것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만족시켜드리기 위해 희생을 치룬 것이 비교할 수 없이 큰 희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자 결정하셨어도 우리의 죄를 그냥 쉽게 무시하실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죄의 대가를 치르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시면서 죄의 대가를 대신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의 고통과 죽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만족시키셨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린 일, 그가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 자기희생의 피로 자기 백성을 살리셔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정리하면 본문은 죄인에게 아무 근거 없이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은 그 이상으로 죄를 싫어하시고 쉽게 용서하실 수 없습니다. 죄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보여주듯,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타내셨듯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용서하실 뜻을 갖고 계시고, 그 어렵고 불가능한 일을 자기 아들 안에서 제시하셨습니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 피하지 않는 자들은 모세가 죄를 다룬 것처럼, 그리고 그 이상으로 자기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는 자는 지옥의 심판을 겪습니다. 죄용서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알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두 팔 벌려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일 것이고, 받은 은혜의 가치를 알게 되고, 그에 합당한 감사를 하나님께 표현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