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7:1-25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지난 시간에 우리는 로마서 6장을 통해 구원이라는 것이 다른 관계, 다른 다스림 아래로 들어가는 것임을 이야기 했습니다. 오늘 7장은 그런 변화가 율법에 대해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십자가에서 육적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담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 아래, 사망 아래,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생명 아래, 하나님의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가 율법과 무관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이 더 이상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고 버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과 성도와의 관계가 어떤 점에서 새롭게 되고, 어떤 점에서는 여전히 계속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율법은 타락 전부터 구원받은 자에게까지 여전히 옳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명 중 하나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계명, 법을 받은 아담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자신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복을 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한 후 그 후손은 어느 누구도 계명을 지킬 기회조차 없습니다. 십계명은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같은 피조물인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때에 복을 누리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한번 타락한 인간은 모세를 통해 받은 십계명과 율법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현실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율법 자체는 선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풍성히 담고 있기 때문에 세상 어떤 지식보다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고, 실천할 때에 복을 얻습니다. 율법은 도덕적이기 때문에 어느 수준 이상 형식적으로라도 지키면 그 개인은 구원과 상관없이 일반은총을 많이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어떤 집단이나 나라에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렇지 않은 곳보다 훨씬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이 됩니다. 그러나 죄인인 인간은 그런 가시적인 유익과 보상이 율법으로 약속되어 있어도 지키지를 못합니다. 정답이 문제 옆에 나와 있어도 사용할 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을 수 없을뿐더러 하나님의 명령이 보장하는 일반은총도 순종으로 누리지 못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을 안내하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지키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율법과 계명에 불만을 품습니다. 그것을 못 지키는 자기를 탓해야 하는데 도리어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 불만을 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의 죄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자극합니다. 사람이 하지 말라는 것은 하려하고, 해야 하는 것은 하기 싫어하는 죄성을 감출 수 없음을 율법이 지적합니다. 정죄합니다.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아는 능력도 없고, 알아도 실행하지 못하는 절망적인 자신의 모습을 거울 보듯 보여줍니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이 아닌 척 숨기지 못하게 하고 드러나도록 만듭니다. 죄가 허황된 것,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임을 알려줍니다.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허무맹랑한 교리가 아니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드러내줍니다. 그래서 율법은 인간이 어리석고, 무능하고, 부패한 존재임을 폭로합니다. 사람이 죽게 된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왔음을 보여줍니다. 율법은 우리가 죄에서 멀어지게 보호해주는 것이 아니라 지키려 할수록 절망과 죽음을 보게 만듭니다. 결국 죄인이 죄의 대가로 고통과 사망을 겪게 함으로써 그것을 경고하신 하나님이 옳으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마치 X-ray, MRI, CT 처럼 우리 몸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정확하게 진단해 주는 장비와 같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암과 같은 죄가 우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율법은 좋은 것입니다. 율법은 문제를 드러내줍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 놀라게 하고 해결책을 찾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그렇게 율법이 좋은 것이고 선한 것임을 알아도, 거기까지 깨달아도, 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지키려 해도 죄를 해결해주지는 못합니다. 마음으로는 율법을 지키고자 해도, 결국 드러나는 것은 죄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13절에서 25절까지 바울이 고백한 내용이 그것입니다.
17절에서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0절에서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고 비참하다고 말한 것은 우리의 모든 잘못과 불순종의 책임을 죄에게 떠넘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죄의 세력 아래에 무기력하니, 애초에 죄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니 싸울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씨름하는 것은 헛수고라고, 율법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율법이 선한 것이고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항상 있는 것이지만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스스로 안심하려고 ‘내가 죄와 싸우고 있고, 죄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어 그러니까 나는 괜찮은 신자야’라는 정당화를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율법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줄 다른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성취하고 순종하게 해줄 다른 시작, 다른 동기, 다른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글로 써진 율법, 그 죽은 남편이 더 이상 아내를 구속할 수 없고 이제는 살아 있는 율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남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이 아닌 전적으로 다른 법, 다른 원리가 우리를 다스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고, 예수 그리스로 인한 생명의 법이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 법 아래에 있는 성도는 우상숭배, 자기 숭배가 아닌 참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 죄인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새로운 법 아래 있는 자는 이기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 생명 주신 예수 그리스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주는 사랑으로 이웃에 대한 계명을 희생적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광을 위한 남은 고난 (롬 8:16-30) (0) | 2019.05.26 |
---|---|
순종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할 (롬 8:1-17) (0) | 2019.05.19 |
벗어날 수 없는 다스림 (롬 6:1-23) (0) | 2019.05.05 |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롬 5:12-21) (0) | 2019.04.28 |
오직 예수로 구원 받음이 확실한 이유 (롬 5:1-11) (0) | 2019.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