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롬 5:12-21)

따뜻한 진리 2019. 4. 28. 23:00

로마서 5:12-2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원하지만 이 땅에는 참된 사랑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그나마 참 사랑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것마저도 완전할 수 없는 이유는 자녀를 끝까지 책임져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인인 우리들을 자기 아들의 희생을 통해 구원하시는 것이야 말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조건 없이 책임지는, 그리고 실패 없이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사랑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그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근거가 우리의 어떠함에 있지 않고, 사랑하시려고 작정하신 삼위 하나님의 결정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대신 예수님께서 죗값을 치르게 하시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순종과 공로가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는지 궁금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희생과 순종과 공로를 우리의 것으로 여겨주실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잘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잘 하신 것인데, 어떻게 예수님 한 분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실 수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연관시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둘째 아담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사람, 그 인류의 조상이 첫째 아담이라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리하신, 완전한 순종을 하신 예수님은 둘째 아담 또는 마지막 아담입니다.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을 함께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왜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 되었는가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 예수님 한 분에 의해 믿는 모든 자들이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태어날 때는 선하게 착하게 태어나지만 자라면서 영향을 받아 악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원래 착하게 태어났는데, 어떤 부모, 어떤 친구, 어떤 사건과 환경을 만나느냐에 따라 점점 악하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원래 착한데 이 세상과 사람들에 의해 이렇게 나쁜 사람이 되었다고 책임을 떠넘기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악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악함에 자기도 악함으로 맞서서 점점 악해지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는 선했다면 아무리 나를 나쁘게 대한 사람들과 환경에 대해서도 선한 반응, 선한 이해를 하것 용서를 하면서 점점 선해져야 하는데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할까요? 이 세상을 아무리 연구해도 그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 답을 가르쳐줍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들이 죄를 지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내가 그렇게 악한 일을 한 적도 없는데 성경이 나를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고 말하는 것에 기분이 나쁠 수 있고, 또 각 개인이 태어난 후에 어떻게 사느냐,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안하느냐로 결정하는 것이 공정한 것인데, 아담 한 사람에 의해 모든 인류가 다 죄인이 되게 하시는 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자존심에 근거한 불만일 뿐이고 우리의 죄인 된 본성을 실제로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죄인이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죄인입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 모두가 죄를 지었다는 증거가 바로 죽음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사람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죄 때문에 있게 된 저주입니다. 아담이 죄 때문에 죽은 것처럼 우리의 죽음도 죄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기에, 그 아담의 죽음에 함께 속해 있었기에 우리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예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함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아담이 겪은 죽음을 함께 겪는 것입니다. 12절에서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죽음이 모든 인간 위에서 왕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을 인정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시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나 자신의 죄 속에서 고백하게 될 때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해 주시는 방법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 안에서 모든 인류의 운명이 결정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모든 믿는 자의 구원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태어난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납니다. 그래서 새 창조입니다. 거듭남입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이 새 창조는 온 우주의 창조보다 더욱 놀랍고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해 모든 인간이 죄인 되게 하신 대표성의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는 대표성의 원리와 같습니다. 그러나 타락의 대표성과 구원의 대표성 원리에 다른 점이 있습니다. 두 대표성의 원리가 완전히 동일하다면 아담 안에서 모두가 죄인이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는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지만,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한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지 않습니다. 아담의 범죄 결과가 모든 사람 각자의 선택과, 자기 책임과 상관없이 무조건 임한 것처럼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으로, 하나님의 선택으로 각 사람에게 임합니다. 그러나 타락과 달리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지 않습니다. 구원은 획일적으로 임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만 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 한 사람한테 온 인류의 운명이 달리게 하신 것에 불만을 품을 수 없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운명에 의해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 내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한 분에 의해 누구든지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고 싶다면,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저주 가운데 죄인 된 것이 싫다면, 하나님 앞에서 선한 존재로 여김 받고 싶으면 드디어 주어진 기회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됩니다. 이제 누구나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