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1:1-45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요셉이 꿈을 해석한대로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그는 요셉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2년이 지났을 때쯤 애굽의 왕 바로가 이상한 꿈을 꿉니다. 바로는 하룻밤에 두 가지 꿈을 연속해서 꿨는데 너무나 두렵고 불안했습니다. 바로의 밑에 여러 점술가와 지혜자들이 있었는데도 그들은 그 꿈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술 맡은 관원장이 자기 꿈을 요셉이 해석해 준 일을 바로에게 말하자 요셉이 바로 앞으로 불려가게 됩니다. 요셉은 바로의 두 가지 꿈에 대해 듣고 다음과 같이 해석해 줍니다.
일곱 마리의 튼실하게 살진 암소가 이어서 등장한 일곱 마리의 흉측하고 마른 암소들에게 먹히고, 일곱 개의 속이 꽉 차고 잘 익은 알곡이 이어서 등장한 일곱 개의 부실하고 속이 빈 쭉정이에게 먹히는 장면은 하나의 사건을 예고하는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칠 년 동안 풍년이 있은 후에 칠 년 동안 흉년이 이어질 것이니 풍년이 있는 동안 수확한 것 중에 오분의 일을 잘 저장해두어 흉년을 대비해야 한다고 바로 왕에게 제안했습니다. 바로는 그 일을 할 책임자, 총리로 요셉을 세웁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셨던 꿈이 드디어 이뤄지는 것을 봅니다. 요셉은 열일곱에 노예로 팔려 억울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는데 삼십이 되어 이제 높아지기 시작합니다. 요셉의 옷은 그의 상태를 드러내는 요소로 계속 사용되었는데, 형들에 의해 벗겨지고, 보디발의 아내에 의해 벗겨졌던 그의 옷은 이제 입혀집니다. 14절을 보면 바로 앞에 가기 위해 요셉은 옷을 갈아입었고, 총리로 세워질 때 바로는 요셉에게 세마포 옷을 입혔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낮아짐과 높아짐은 이후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낮아졌다가 다시 출애굽하여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며 높아질 것을 예고하는 일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셔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높아지심을 예고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모든 성도들의 낮아짐과 높아짐을 약속하는 모형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이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라고 말하듯 하나님께서는 낮아짐과 높아짐이라는 반복된 패턴을 통해 우리가 현재의 고난 속에서 겸손하게 순종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고 영광스럽게 하실 때를 소망하게 하십니다.
다음으로 본문에서 하나님이 바로를 다루신 것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애굽에서 바로는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그가 꿈 때문에 두려워했습니다. 그 꿈은 그저 바로가 꾼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주신 꿈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에게만 꿈을 주실 뿐 아니라 다른 자들에게도 꿈을 주시거나 꿈에 나타나신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래를 두고 속였던 그랄 왕 아비멜렉의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막으셨고, 야곱을 뒤쫓던 라반의 꿈에도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영화에서 외계의 존재나 악한 영적 존재가 사람을 지배하고 움직일 때 그 몸의 주인과 거래를 하면서 들어가거나, 또 특정한 사람에게만 들어갈 수 있다고 설정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생각과 꿈에 등장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들어가셔서 그 사람을 로봇 다루듯이 조종하는 분이 아니시고, 자기 말을 안 듣는 모든 사람들의 꿈에 나타나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계획하신 일을 진행하시는 과정에서 특별한 경우에만 자기 백성이나 자기 백성을 해하려는 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것도 인격적으로 경고하시고, 설득하시기 위해서 그런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에게 꿈을 주셔서 그 꿈을 해석할 요셉을 찾게 하신 것이고, 그 꿈 내용대로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통해 애굽을 사용하시려 한 것입니다. 요셉을 높이시고, 흉년 동안 야곱의 가정을 애굽으로 불러들여 돌보시려고 바로에게 꿈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25절과 28절에서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이 하실 일을 바로에게 꿈으로 보이신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주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도록 자기 백성들에게 역사하시고 함께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어떤 시대 어떤 지도자에게 지혜를 주셔서 그 나라가 잘 되게 하시기도 하고, 반대로 어리석은 지도자의 악한 생각을 내버려두셔서 심판의 고통을 겪게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 자기 백성을 위해 세상 나라를 사용하시기도 하고, 자신의 나라를 대적하는 나라를 무너뜨리기도 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당할수도 있고, 멸절되는 것 같은 상황이 될 수 있으나 하나님은 그런 과정을 통해 자기 백성을 낮추어 겸손하게 만드시기도 하고, 높이셔서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세상 나라와 지도자들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 아래에서 요셉이 겪은 일과 이스라엘이 겪은 일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요셉의 확신과 겸손을 생각해야 합니다. 요셉은 참으로 당당하고, 거침이 없습니다. 그는 두 관원장 앞에서처럼 바로왕 앞에서도 자신이 꿈 해석을 할 수 있다는 분명한 확신을 드러냈습니다. 또 흉년을 대비할 명철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세워야한다고 제안할 때 자기를 염두에 두고서, 자기가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요셉은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형과 가족들 앞에서도 그랬고, 바로 왕 앞에서도 그랬습니다. 그가 철이 없고 겁 없고 부주의해서 그랬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단지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요셉이 마주했던 바로는 애굽의 왕이었습니다. 바로 왕 앞에 서서 그의 꿈을 다룬다는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있을 때 두 관원장들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바로의 엄청난 권력을 이미 경험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꿈을 잘못 해석했다가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주저함 없이 확신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자기 능력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용하신다는 확신이었습니다. 16절을 보면 요셉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를 안심케 해줄 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은 바로가 그런 꿈을 꾸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꿈이 의미하는 바가 현실이 되게 하실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꿈의 의미를 깨닫게 하실 분도 하나님이신데 그 꿈의 의미를 전달하는 자로 자신을 하나님이 사용하실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확신했습니다. 동시에 요셉은 주권자가 하나님이시기에 겸손했습니다. 요셉은 자기 확신만 가득한 건방진 자가 아니라 보디발에게나 간수장에게나 인정받는 성실하고 겸손한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확신만 주신 것이 아니라 겸손할 수밖에 없도록 훈련을 시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겸손할 수밖에 없는 노예와 죄수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가 아무리 성실하고 실력이 좋았어도 겸손하지 않았다면 보디발과 간수장은 마음 편하게 자기 일을 맡길 만큼 요셉을 신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분명 자기에게 능력을 주셔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라는 사실로 인해 겸손했던 것입니다.
성도인 우리도 확신과 겸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답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꿈 해석에 대해 확신을 가진 것처럼 성도는 세상의 의미, 인생의 목적, 시작과 끝을 알고 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로의 꿈을 그 자신과 신하들이 해석하지 못한 것처럼 사람들은 세상 속에 살고는 있지만 세상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제외한 채로 우주의 시작과 자기 존재의 근원을 알려고, 인생의 의미를 찾고 발전과 행복을 추구하려고 과학과 철학을 발전시켰지만 그것으로 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답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고,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마지막에 일어날 일을 알고, 죄인인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답을 알려주고 있기에 우리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겸손하게 됩니다. 요셉이 자기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알았기에 겸손한 것처럼, 우리가 가진 답이 우리가 알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을 알기에 우리는 겸손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요셉이 보여준 바른 신앙의 확신보다 왜곡된 신앙을 가지고 자기 확신에 빠진 자들을 흔히 보게 됩니다. 그들은 겸손보다 무례함과 비도덕적인 행태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회를 부끄럽게 합니다. 그들이 뉴스에 등장하는 것으로 인해 교회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강해지고 부끄러움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위축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시대와 환경이 그렇다 해서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확신 없이 그저 교회에 속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확신 없이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모르고 어리석은 것을 추구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이 진리이고 참인지 전달하려는 확신과 담대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바로가 자신의 꿈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것처럼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도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세상에 펼쳐진 것들과 사건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인 줄 모르고, 심판의 경고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자신들 앞에서 일어날 심판을 어떻게 대비할지 모릅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우리는 평소에 요셉처럼 성실하고 겸손하게 맡은 일을 해야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불안과 무력함과 낙심을 경험할 때 답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에게 불안한 꿈을 주시고 요셉을 사용하셔서 자신을 드러내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난과 불안을 주시고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실 때가 있으니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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