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19-4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신 일로 유대인들이 박해하자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이 예수님 자신과 성부 하나님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더욱 죽이려고 했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저 인간으로 본 것입니다. 감히 한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무지와 불신에 대해 일종의 자기변호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그 설명들은 우선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의 관계가 매우 긴밀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즉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성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친히 보신대로 자신도 행하시는 것이라고 뜻입니다. 이뿐 아니라 30절에서 예수님은 성부의 말씀을 “듣는 대로”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친히 보고 듣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런 긴밀한 관계를 기반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성부께서 생명의 주관자이시듯 자신도 생명을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어떤 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고, 안식일에도 생명을 돌보시는 일을 하실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런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역사로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봐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돌보시고, 치료하시는 일을 보면서 그분을 경외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단지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릴 뿐 만 아니라, 그 생명을 주관하는 권한으로 마지막 때에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인간들을 살려내 심판대 앞에 서게 하실 분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어떤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어떤 자에게는 영원한 고통을 주실 수 있는 것은 성부께서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22절에 “맡기셨으니”, 26절에 “있게 하셨고”, 27절에 “권한을 주셨느니라”라는 말로 성부께서 예수님께 위임하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권한으로 예수님께서는 성부와 자신이 동등한 일을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설명을 듣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봤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당시 그 말씀을 들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친히 보고 듣는 관계인지,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이 주신 권한으로 그런 말씀과 일들을 하는 것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이든 목격자나 증인, 외부의 어떤 증거가 있어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자기 일에 대하여 스스로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1절에서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자기 망상이나 속임수가 아님을 다른 증거자들이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첫 번째 증인을 세례요한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런데 34절을 보면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하였지만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증언에 의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지지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예수님의 사역이 설득력을 얻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증인으로서 세례요한을 언급하신 이유는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 유대인들이 인정하는 세례요한의 말이라도 잘 알아들어서 나를 알아보고 구원을 얻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충분하게 예수님을 증명할 수 있는 증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성부하나님입니다. 성부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행하시는 사역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부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36절에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37절에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38절에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체험한 역사와 말씀을 가진 장본인이 이스라엘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8절에서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니라”라고 예수님이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애초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추구하는 자신의 영광, 즉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일을 하나님에게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래 사람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영광 아래에 거할 때 자신도 영광스러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배척하고,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려는 인간이 스스로 높아지고 싶은 본성을 어떻게 충족하겠습니까?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서 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아져서 영광스럽게 되거나 높아진 자의 아래에 들어가서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인간 서로가 영광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욕구가 집중되고 발전한 것이 종교입니다. 신을 섬기는 것 같지만 신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인정과 복종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된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이용하기만 했지, 서로 칭찬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높여주고, 서로 희생양을 만들어 죄책감을 해결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44절을 보면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니 멸망할 인간들끼리 서로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문제를 드러내실 때 예수님이 하나님을 빙자한다고 정죄했지만 정작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용하기만 한 신성모독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특별히 여기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영광을 추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42절에서 예수님은 정확하게 그 근본원인을 지적하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그들은 그 긴 역사 속에서 확인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여전히 믿지 못하니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부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신뢰하셨습니다. 20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자신의 영광이 되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저 하나님께 의존하셨고, 순종하셨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으시고 성부 하나님께서 보이신 대로(19절), 맡기신 대로(22절), 권한을 주신대로(27절), 하나님의 뜻대로(30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진정 인정받으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지지,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34, 41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을 신뢰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다는 것을 알고 믿을 때에 그분의 영광을 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운운하는 것은 종교적 가치를 이용해서 자기를 높이는 술수에 불과합니다.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위하겠다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교회가 “신의 영광”이라는 감히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는 주제를 높이 쳐들었다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이 날 사랑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이시고 전지전능한 절대자이시니까 나는 하나님을 무조건 사랑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자신이 누구신지를 우리에게 알리신 것에 대한 반응으로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분명하게 드러난 자신의 사랑을 근거로 자신을 신뢰하고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하시는 분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자연스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순종으로 날 사랑하시는 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나에게도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에게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당연한 인격적인 사랑과 순종이 없으면 하나님의 영광은 그냥 장식품이고 깃발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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