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16-59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오병이어의 기적 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거기까지 무리들이 배를 타고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온 의도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으로 그분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되는 것이 "표적"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표적"을 보지 못하고, 육적인 것에 눈이 멀어서 자신들을 배부르게 할 떡만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금방 소화되고 마는, 사라지는 양식에 집착하고 있는 그들에게 ‘영원히 살게 하는 항상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 그 양식은 인자가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런 없어지지 않는 양식을 얻고 싶었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까요.”라고 물었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거기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 보낸 인자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알아챕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바, 광야에서 모세가 하늘로부터 떡을 주어 조상들이 먹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있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여기까지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계속 먹는 떡을 생각하고 있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 예수님을 믿을만한 분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만한 내용으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증거가 부족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 자신(자체)이 누구인지를 알고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5절부터 본문 마지막 59절까지 “영생하게 해주는(27절)”,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일(29절)”을 가능케 하는 “표적”으로서의 자신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이 가르침 속에서 강조 반복되는 내용들이 있는데, 그중 첫째는 “나는 떡이다.”입니다. 예수님은 35, 48절에서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고, 33절에서는 “하나님의 떡”이라고 말씀하셨고, 33, 50, 51, 58절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특별히 51절에서는 그 “하늘에서 내려온”에 “살아있는 떡”을 추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 주신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음식은 먹히기 전에 죽거나 먹힌 다음 소화되어 죽지만 생명의 양식이신 주님은 먹은 자의 일부가 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먹은 자 안에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그 안에 거하게 되고,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56절).
두 번째는 ‘영생을 주는 떡’입니다. 50, 51, 54, 58절에서 그 내용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보통 떡이 아니라 죽지 않게 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49, 58절에서 광야의 만나, 즉 육신의 떡을 먹은 조상들은 죽었다는 것을 그들이 생각나게 하심으로 조상들의 한계와 동일하게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죽음을 이기게 하는 생명의 떡인 예수님은 그것을 뛰어넘게 하는,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음식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강조하신 것은 영생의 떡이신 예수님이 하실 일로써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입니다. 39, 40, 44, 54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영생을 가진 자들을 예수님이 다시 살리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생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는, 먹는 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육신이 죽지만 마지막 때에 죽지 않을 생명으로 다시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부활의 생명을 줄 권한이 자신에게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음식으로서의 떡은 그 자체가 생명이 없고, 그것이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생명에 도움을 주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음식이 그렇듯 사람에게 그저 에너지를 공급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 자체를 주는 떡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시는 분입니다. 음식은 생명을 유지시켜주기는 하지만 생명 자체를 있게 하지는 못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생명 자체를 주시는 분입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은 “믿어야 한다.”입니다. 29, 40, 47절에서 믿는 자가 영생의 떡이신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본문의 내용을 가르치실 때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그들은 믿음을 강조하는 예수님의 말씀(29절)에 모세 시대처럼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보이라(30절)고 반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하나님이 하늘에서 양식을 주신 것처럼 영의 양식도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내신다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절)”라고 말했습니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그런 물이 있으면 내게 달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셨다고(38절), 아들인 자신을 보고 믿어야 한다고(40절)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그들은 아버지 요셉을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하늘에서 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42절) 말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생명의 떡인 자신의 살을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자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수근거렸습니다(41절). 예수님이 자신을 믿을 수 있도록 자세한 가르침을 주시는 중에도 그들의 불신은 그렇게 일관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시는(37절), 이끄시는(44절), 아버지께 듣고 배운(45절) 자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은 ‘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51, 53, 54, 55. 56절). 이 내용의 반복 강조는 본문의 끝부분인 51절 이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떡인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기 위해서는 주님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먹어야, 양식 삼아야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분명한 내용으로 가르침을 마무리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당해도 결국 살기 위해서 먹습니다. 그러니 불신이 가득한 그들에게 그 말씀을 하신 것은 ‘너희가 아무리 나를 믿지 않으려 해도, 살고 싶으면 결국 나를 의지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유일한 양식은 지금 눈앞에 계신 예수님이고, 그분에게서 벗어나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옛날부터 하나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먹는 것으로 연결시켜 가르치신 것이 구약에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하던 때에 열 번째 재앙이 임하던 날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을 통해서 사람들이 살 게 하신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바르는 것 뿐 만 아니라 그 양의 고기를 먹어야 살 수 있었습니다. 또 광야에서 그들에게 만나를 먹이심으로 생명이 음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날마다 주시는 하나님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순종하는 것에 생명이 있음을 체험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드디어 살아계신 유월절 어린양이요, 하늘로부터 온 살아계신 만나가 눈 앞에 계셨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구약 때나 예수님 때나 여전했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으로 가르치셨을 때 백성들이 보였던 태도는,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먹이셨을 때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유한한 만물들, 먹기도 하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만들어 주신 이유는, 유한한 경험을 통해 궁극적으로 영원한 것을 주시려는 하나님을 알아보고 믿으라고 주신 것인데, 도리어 사람은 유한한 것에 사로잡혀서 거기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의 주인이 나타나도 사람이 계속 요구하는 것은 배불릴 음식, 유한한 것을 더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살 기 위해 음식을 계속 먹듯, 우리가 참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필요로 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음식에 대한 강한 욕구를 느끼는 것처럼, 먹기 위해 사는 것인지 살기 위해 먹는 것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음식에 강한 애착을 갖는 것처럼, 나의 생명이 예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믿고 의존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에게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양식 삼고자 하는 식욕이 없다는 것입니다. 입으로 들어가서 배설물로 나오는 음식에 대해서는 무한한 식욕을 가지고 있는데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원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 식욕, 주님을 갈급히 여기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건강한 자만이 정상적 식욕을 가지듯 거듭나서 영적 생명을 가진 자만이 주님으로 만족을 얻고자 하는 영적 정서를 갖게 됩니다. 그는 주님으로 인해 자신이 사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주님이 나의 떡이고 음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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