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5:1-2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셨습니다. 포도나무는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했습니다. 시편 80편 8절을 보면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이사야 5장 7절을 보면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사람이라”라고 말합니다. 또 에스겔 15장 6절을 보면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수풀 가운데 있는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땔감이 되게 한 것 같이 내가 예루살렘 주민도 그 같이 하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절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은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을 심으신 농부이십니다. 농부가 나무를 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과실을 얻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열매를 드리기 위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지적하시면서 “열매로 알리라”와 같은, 열매를 통해 나무의 상태를 판단하고 심판하는 일이 있을 것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나쁜 열매를 내었고, 하나님이 기대하신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1절에서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말씀하신 동시에 예수님 자신이 참 이스라엘이고 하나님 나라가 되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 포도나무라고 해서 열매를 내시는 일을 혼자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람들을 통해 열매를 맺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에게 붙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해석자들, 설교자들은 그저 ‘붙어있기만 하면 된다.’고 강조하곤 합니다. 그런데 붙어 있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2절을 보면 붙어 있는데 열매를 맺지 않으면 제거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붙어 있는 것 이외의 다른 조건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4절부터 7절에서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는 상호간의 긴밀한 연합을 여러 번 반복하셨습니다.
남이 보기에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나 외형상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붙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착각했습니다. 또 바리새인들도 착각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있는 것, 진정 붙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통함이 있는 것입니다. 가지를 접붙여서 모양은 붙어 있는데 세포가 결합이 안 되고 생명이 통하지 않으면 죽은 것입니다. 그것은 붙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접붙였지만 죽은 가지입니다. 가지는 나무의 원줄기, 본체에서 주는 생명력을 받고, 본체에서 보내준 명령과 신호대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제대로 살아서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가지가 자기 생명을 본체에 의존하고 있어야 하고, 반대로는 본체의 생화학적 흐름에 가지가 따르고 순응해야만 살아서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께 제대로 살아있는 가지로서 붙어있는 것은 어떻게 확인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9절과 10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가지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붙어서 거하며 순종하신 것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예수님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신뢰하시듯 우리도 예수님을 신뢰할 때 붙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붙어있는 것으로 기쁨을 얻는 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도 할 것이고, 그 순종을 통해 그는 주님을 만족시켜드렸다는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주님 안에 거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한 자는 순종하지 못할 것이고, 자책감만 커질 것이고 그로 인해 결국 떠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순종의 내용을 바로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 누린 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자신의 순종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계명입니다. 12절에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7절에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는 친구로서 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일, 그 사랑을 경험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신 자에게만 일어납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보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십자가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감상적인 사랑 자기 욕망을 위한 다른 사랑을 찾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가지와 같은 성도들이 사랑을 전해주려고 할 때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않기 위한 핑계를 댑니다. 자신들의 핍박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를 악하다고 몰아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문의 후반에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7절부터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것이라는 내용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께 제대로 접붙여진 가지로서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는 사람은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할 것이고 그로 인해 핍박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선교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입니다. 예수님의 가지가 되어서 사랑 때문에 핍박당하는 것이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바른 진리를 배우고, 분별해야 하지만 우리가 깨달은 것을 탁월하게 전한다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정직하게 전하는 일과 함께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이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일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셨으나 고난당하시고 죽임 당하신 것처럼 먼저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 다른 죄인들을 사랑함으로 핍박당하여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리를 듣고 우리의 사랑을 보고 깨달아 거듭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의 능력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6절을 보면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인 구원의 효력은 성령에게서 나옵니다. 가지인 사람이 할 일은 겸손하게 진리와 사랑으로 고난당하는 것입니다.
살아있어서 열매 맺는 가지는 그런 고난당하는 일에 묵묵히 순종할 것입니다. 그 고난이 예수님이 예고하신 것이고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위해 겪으신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셨으니 우리도 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20절). 그래서 참된 가지는 주의 계명에 순종하여 겪는 고난 때문에 생명을 얻으려고 더욱 본체에 붙어 있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그 사랑 안에 거하려고 할 것입니다(9-11절). 그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이고 은혜이심을 고난 속 순종을 통해 더욱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로 인해 가장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대로 끝까지 주님께 끝까지 붙어 있을 것이고, 끝까지 주님 안에 거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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