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36-14:24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가룟 유다의 배반에 이어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셨습니다. 베드로는 13장 36절에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말은 라틴어 발음으로 쿼바디스 도미네인데, “쿼바디스”라는 영화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목숨 바쳐서 따라가겠다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가 따라오기는커녕 예수님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예수님이 자신들과 헤어지게 될 것,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음을 자꾸 말씀하시자 두려웠을 것입니다.
마치 밀림 한 가운데서 아빠가 어린 자녀에게 이제는 아빠를 더 이상 따라올 수 없다고 말할 때 그 아이가 느낄 두려움, 공포 같은 것을 제자들이 느꼈을 것입니다. 아이가 아버지로부터 경험했던 안전함과 자신감이 클수록 아버지와 떨어질 때의 두려움도 커질 것인데, 제자들은 어떤 인간에게서도 경험하지 못한 능력과 인격적 관계를 예수님에게서 경험했기 때문에 그 상실감은 매우 컸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아빠와 아이가 생이별을 하는듯한 불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3장 33절에서 제자들을 “작은 자들아”라고 아버지가 아이들을 부르듯 하시면서 자신이 곧 떠날 것과 제자들은 따라올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14장 18절에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라고 아빠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망연자실한 가운데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몰라서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4절에서 예수님이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라고 말씀하신대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5절에서 도마가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을 모른다고 말한 것과 8절에서 빌립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말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 정말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인지 증명해달라는 고집을 부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일이 자기 생각대로 하는 자의적 행동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원하시는 일임을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아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친밀함은 요한복음에서 계속 강조되었는데 예수님은 본문에서도 “아버지”라는 단어를 17번이나 사용하시면서 자신의 길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믿는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순종하시는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는 것을 마땅한 일로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안심시키려고 말씀하신 것 중에 또 다른 한 가지는 ‘영원한 거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로 가시는 것이 제자들과 거할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2절, 3절, 2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쉼과 안전을 제공해 줄 집을 마련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거처를 마련하셔서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은 더 좋은 만남, 다시는 헤어질 필요가 없는 만남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예수님은 그렇게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27절에서도 유사하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우리가 믿는다면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일이고, 또 예수님을 위한 일임을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느냐고 도전하신 것입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죽게 하시는 것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예수님을 그냥 놔두시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님은 죄 가운에 심판당할 우리를 그냥 놔두실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시고, 우리도 살리셔서 다시 만나게 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죽음으로 영영 끝나서 이별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실 것이고, 다시 볼 것이라고 18절, 19절, 2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두려운 곳입니다. 이 세상은 문명이 발달해도 여전히 약육강식의 힘이 지배하는 곳이고, 죽음의 위협이 도처에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도움이 필요한데 도움을 주셔야 할 분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했는데, 우리 인생에 불안한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증거가 아닙니다. 우리는 버림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예수님이야말로 버려진 자식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등지고 떠난 자식처럼 고통 가운데 버려지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사랑하심을 확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그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또 제자들에게 주시려 했던 그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을 갖고 안개 속과 같은 인생 중에도 안심하며 인내합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거처에 대한 약속을 주신대로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기 원합니다. 그것이 도피적인 것이 아니라 주의 명령, 성도로서의 삶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가운데 그 끝에 우리를 안아주시는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기를 바랍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지가 끝까지 붙어 있는 이유 (요 15:1-27) (0) | 2015.09.06 |
---|---|
삼위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요14:25-31) (0) | 2015.08.30 |
배반하는 자와 구원 얻는 자의 차이 (요 13:21-38) (0) | 2015.08.16 |
먼저 발을 씻기신 주님 (요 13:1-20) (0) | 2015.08.09 |
십자가에 달리는 것으로 답하심 (요 12:20-50) (0) | 2015.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