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1-24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는 걱정하는 제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자신이 부활하실 것과 세상 마지막에 다시 오실 것과 영원한 거처와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로 위로하셨습니다. 그런 내용들은 곧 닥칠 일,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게 달려 죽으시는 일로 인한 제자들의 근심만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제자들이 살게 될 남은 인생 전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제자들이 겪게 될 일은 무엇입니까? 세상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듯이 동일하게 제자들과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려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앞으로 당할 그런 일들이 피해야 할 일들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감당해야 할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고난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이 제자들에게 계속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함께 계셨을 때 경험했던 일을 이 후에도 겪게 되면서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베푸셨던 기적과 복음전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이제 자신들이 하고 있고, 또 그로 인한 핍박도 당하면서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의 내용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어찌 보면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런 고난을 겪게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가 사람들의 어둠을 비추셨고 그로 인한 사람들의 분노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위협이 되었던 것처럼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하셨던 일과 동일하게 사람들의 죄를 밝히실 것입니다.
그래서 8절을 보면 성령께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실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9절이 말하는 대로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회의 도덕, 질서를 위반하는 것이 근본 죄가 아니라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해 온 인간은 예수님으로 그분이 오셔도 당연히 거부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믿으려 하지 않는 그 완악함이 죽음을 가져오는 죄입니다.
다음으로 성령께서 의에 관해서 책망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의가 예수님으로 입증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옳다고 여기실만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자신들의 종교적 의를 지적하고 무너뜨리려하자 그를 죽이는 것이 그 의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정하신 옳은 일, 의는 그들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접하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옳으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것을 근거로 인간들의 거짓된 의를 책망하신다는 뜻입니다.
심판에 대해 책망하신다는 것은 세상이 예수님을 심판하려 했지만 도리어 세상이 심판 받게 된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여 끝내려 했지만, 끝난 것은 세상의 아비 사탄이고, 판단 받는 것은 믿음 없이 예수님을 죽인, 끝까지 하나님의 손길을 거절한 자신들임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사람들의 죄를 다루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하시고,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들은 믿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복음 전하는 자들을 핍박할 것입니다. 33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일을 계속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일들을 제자들이 당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제자들에게 그런 고난만 있게 된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성령께서 예수님 자신을 경험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4절과 15절에는 예수님 자신을 뜻하는 “내 것”이 반복되는데 이것은 성령의 임재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친밀히 경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지만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이뤄지는 것을 보게 되고,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분명 살아계셔서 여기서 지금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 것을 확신하게 되고 그로 인한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걱정은 그 기쁨에 가려질 것입니다. 20절에서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2절에서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4절에서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 속에 거하시는 성령을 누구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얻은 구원을 누구도 흔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제자들이 누리게 될 또 다른 유익은 바로 기도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통해 예수님이 사람들 속에 오시게 될 때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셔서 우리의 중보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그 관계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것을 믿는 자, 성령이 그 안에 계셔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믿게 된 자는 구원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기도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놀라운 사실을 믿고 구하게 됩니다. 기도가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 성령이 성도 안에 계시기 때문에 구해야 할 것을 깨닫게 하셔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자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그로 인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신 것은 제자들에게 당장은 큰 슬픔이었지만 궁극적으로 기쁨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이 제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임은 물론이고 모든 백성을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절을 보면 “너희는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떠나셔서 성령께서 오시기 때문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의 말씀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에 보이는 육체로 계실 때 보다 예수님을 더 깨닫게 되고, 더 잘 믿게 되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 성령의 일이 필요합니까?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변화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강퍅한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성도는 고난을 당합니다. 동시에 고난 때문에 성령께서 위로하시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도 주십니다. 그런 삶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게 만듭니다. 믿음을 더욱 단련합니다. 고난 가운데 기뻐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난과 기쁨이라는 이중적인, 반대의 것이 뒤섞여 있는 일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일은 언젠가 그치고 성도가 완전한 기쁨을 영원히 누릴 날이 있게 됩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33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까지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도 겪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쁨도 주시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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