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우리의 의미와 목적을 알려주는 기도 (요 17:6-26)

따뜻한 진리 2015. 9. 27. 22:47

요한복음 17:6-26 (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고, 이어서 이 본문에서는 제자들과 제자들로 말미암아 믿게 될 모든 성도들, 즉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신 예수님 자체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 가치와 목적을 스스로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다른 존재를 통해 그 의미를 찾습니다. 어린아이는 성장하면서 부모와 가족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 자기 이해를 얻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대해주는가에 따라 인생의 의미가 있고 없음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존재의 의미, 삶의 목적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부터 옵니다. 사람에게 사랑이 중요한 것도 바로 그런 의미를 샘솟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이 그런 식으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는 것, 나의 가치, 삶의 목적을 알게 해주는 것은 우리의 외형, 소유, 시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변합니다. 그래서 늙고, 병들고, 능력이 없으면 존재의 의미, 삶의 목적도 사라집니다. 나에게 의미를 던져주던 것들이 더 이상 나에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난 일들, 추억이 생의 무의미함 속에서 간신히 버티게 해줍니다.

 

    그러나 성도는 자신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자신의 존재 가치와 목적을 풍성히 얻습니다. 그 의미가 세상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가 그것을 깨닫게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기도 중에 아버지의 이름을 수차례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는 것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지키신 것이 자신의 일이었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런 표현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성경이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자신을 설명하시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또 야곱이 씨름 후에 하나님께 이름을 물었을 때도 이름을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셨듯이 그의 이름도 이스라엘로 바꾸셨습니다. 창세기의 인물들은 그저 자기가 하나님을 만난 것을 기념해서 장소에 이름을 붙이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처음 계시하신 것은 모세를 통해서 야훼의 의미가 스스로 있는 자라고 알려 주신 일이 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주시고 의미를 설명하셨다는 것은 엄청난 선물입니다. 피조물에게 자기를 알리시며 인격적으로 관계를 이루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소개할 때 형식적으로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친해지고자 하는 친구, 사귀고 싶은 이성에게 이름을 말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다릅니다. 나를 주고 싶어서입니다. 그런 의미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천천히 계시하신 것입니다. 상대할 수 없는 갭이 있는 우리, 이렇게까지 대우하실 필요가 없는 죄인인 우리에게 자기 이름을 매우 조심스럽게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키우는 동물한테도 자기 이름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를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피조물인 우리에게 자기 이름을 알리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고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에서 우리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얻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예수님으로 극에 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기 이름을 주셨고, 아들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억지로 사랑스러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이 우리의 존재 의미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것을 함축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의 존재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받는 존재인데, 왜 힘든 세상을 살고 있는지, 이 고난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 기도가 알려줍니다.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세상을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이 자기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하려고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자신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보내십니다. 18절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몰랐지만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것으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고, 예수님도 사랑하시는 아들임이 드러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고난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임도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23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난 받을 제자들이 안타깝지만, 그들이 이 세상으로부터 빨리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 속에서 바르게 견디며 목적을 잘 수행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14절부터 19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죽이려는 세상에서 진리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이 세상 속에서 고난당해야 할 것을 이유가 있음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으신 것처럼 제자들과 우리가 고난을 통해 기쁨과 영광을 얻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존재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자기가 누군지를 갑작스럽게 밝히시며 일방적으로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상대의 이름을 지어주고, 고쳐주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하나님과 관계할 수 없는 죄인인 것이 드러난 후에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알리시며 자신을 주시려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하신 우리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를 통해 세상이 하나님을 알도록 하십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인생의 목적입니까! 복음은 이렇게 우리 존재의 의미, 가치를 우리에게 알려줄 뿐 아니라 인생의 목적도 깨닫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도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인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지, 인생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반응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사랑에 속한 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 예수님처럼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아들이셨고,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위해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