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자신을 잡아가게 하신 주님 (요 18:1-11)

따뜻한 진리 2015. 10. 11. 23:04

요한복음 18:1-11                                                 김영제 목사(하늘기쁨교회)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야기하시고 기도하신 후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도착한 곳은 다른 공관복음이 말하고 있고, 우리가 아는 곳인 겟세마네 동산일 것입니다. 2절에 나오는 대로 그곳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익숙한 곳이자 의미 있는 장소였기 때문에 가룟유다도 예수님이 거기 계실 것을 예상하고 찾아왔습니다.

 

    유다는 혼자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라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군대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정권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군대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군대는 로마군대를 말하며 적어도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에 달하는 군사가 동원된 것입니다. 유대지도자들은 로마당국과 사전 협의를 한 것입니다. 3절에 나오는 대로 그들은 무기로 무장을 하고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중무장을 한 군사들을 동원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 뿐 아니라 제자들까지 진압하려 한 것입니다. 또는 체포과정에서 예수님을 지지하는 민중이 방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아무도 모이지 않는 밤중이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신비로운 능력으로 자신들을 저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그들은 예수님 한 사람을 잡는데 일어날 수 있는 만약의 일들을 대비했습니다. 그들은 체포하려는 예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과장된 힘을 준비해서, 어색하게 예수님을 잡으러 온 것입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이 근처에 왔을 때 예수님은 미리 아시고 그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질문 하셨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나사렛 예수요.”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나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때 그들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물러서서 엎드렸습니다. 그들이 놀란 원인은 아마도 잡아야 하는 예수님이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와 무리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먼저 오셔서 기다리셨고,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들고 사물을 간신히 파악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밝히셨습니다. 본래 쫒기는 자는 추적자들의 기척을 느끼면 달아나야 하는데, 예수님이 도망가지 않고 거기 서서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과 그게 나다.”라고 밝히신 자체가 그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또 잡으려는 자들이 그 순간에 공적인 명령 때문에 예수님을 체포하려 하지만 그들이 개인적으로 이전부터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던 어떤 신성함이 두려워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놀란 그들에게 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시고 그들이 찾는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다시 밝히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함에 굴복했지만 잠시 후 그분을 체포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순순히 잡히는 조건으로 제자들은 놓아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저자 요한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1712절에서 말씀하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의 내용을 성취하신 것이라고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담보로 제자들의 안전을 보장하셨습니다. 자신을 죽음에 넘기고 제자들은 자유롭게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참된 목자로서 자신의 양들을 돌보시고 지키셨습니다.

 

    본문의 사건에서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앞에서 계속 강조하셨던 대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로 가는 것이 죄인들의 생명을 위한 것이고, 자신의 영광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체포되는 순간에 무기를 든 무리에게 주도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내리쳤을 때도 예수님은 그의 개입이 오히려 방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치료해주셨습니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들이 자신을 잘 잡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잡아가도록 안내해주시는, 허락해주시는, 도와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이 잡혀가는 과정에서 주도권을 가지신 예수님은 다른 권리도 주장하십니다. 그것은 제자들에 대한 권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잡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니 제자들은 놓아주라고 요청하셨고, 그래서 제자들은 잡혀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사람들을 위해 홀로 고난을 당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 우리들을 대신해서 혼자 고난을 당하시는 그것이 제자들에게 먼저 표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인 사람에게 기꺼이 잡히셨다는 것은 설정된 드라마를 찍는 것도 아니었고, 아빠가 아이들과 장난감 총싸움을 하면서 죽는 척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죄인인 인간이 감히 저질러서는 안 될 일을 신이신 그 분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모든 권능의 주체이신 분이 악하고 어리석은 피조물에게 잡히셨습니다. 또 잡히시는 척하다가 반격하신 것도 아닙니다. 잡히셔서 수치를 당하시고 죽임당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지금도 일어나지 않습니까? 인간들이 신의 존재 유무를 스스로 결정합니다. ‘내가 신을 무시를 해도 신은 나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을 보니 신은 없는 것이 분명해하고 생각할 만큼이나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숨기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능력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실수로 잡히신 것이 아닌 만큼이나 하나님은 실수로 세상에게 무시당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권을 가지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잡혀가는 것이 무력한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 순간에도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과 그 능력은 여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잡힘을 통해 제자들을 자유롭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생각하는 힘,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을 주심으로 자신의 사랑과 능력을 표현하시지 않고, 자신만이 주실 수 있는 그런 자유와 생명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셨기 때문에 죄인인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주시는 것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자발적으로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시라면 그분의 사랑을 발견할 수 없는 것 같고, 그분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는 현실도 그분의 주도권 아래에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