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일 (마 8:18~9:8)

따뜻한 진리 2017. 12. 31. 18:58

마태복음 8:18~9:8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셨을 때 사람들은 놀라고 흥분했습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의 그런 이적들을 목격하고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제자가 되겠다고, 어디로 가시든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의 열정을 회의적으로 보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과 함께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면서 고생해야 할 것들, 그런 인간적 불편과 기본적인 대접을 받지 못하고 핍박당해야 할 것을 각오해야 함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서기관이 예수님의 그런 말씀을 듣고 어떻게 했을까요?

 

    이번에는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 나타납니다. 이 사람은 앞에서 예수님이 서기관에게 하신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치러야 할 희생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아버지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서 며칠 간 장례를 치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지금은 건강하게 살아계시는데 나중에 돌아가셔서 돌봐드릴 필요가 없게 되면 그 때서야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의미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여튼 이 사람은 지금 당장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하지 않고, 기회가 되면 따라가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예수님이 지금 자신을 필요로 하신다면 즉시 따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스케줄에 예수님이 따라줄 수 있겠냐고, 기다려줄 수 있냐고, 나중에도 받아 줄 수 있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보다, 오히려 예수님이 자신에게 맞춰주고 따라와 주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자기의 현실이 그럴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도록 놔두라고,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영적으로 죽은 자들끼리 서로의 죽음을 정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갔을까요?

 

    사람들이 몰려드는 탓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고자 하셨고, 사람들을 돌보시느라 피곤하셨던 예수님은 잠이 드셨습니다. 그 사이에 심한 풍랑이 일었습니다. 그곳은 갈릴리 호수였지만 히브리인들에게는 바다와 같았고, 그런 큰 물은 항상 두려운 대상입니다. 그런 바다가 휘몰아칠 때 작은 배에 타고 있었으니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제자들은 두려워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는 어찌해서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고, 바람과 바다에게는 꾸짖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는 잠잠해졌고, 제자들은 놀라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사히 건너편에 도착해서도 예수님은 누군가를 또 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거기서 나온 귀신들이 돼지들에 들어가고 놀란 돼지들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또 다른 손해가 날까봐 예수님을 떠나시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을 쫒아내셨고,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쫓아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도 치료하셨습니다. 특별하게도 예수님은 그의 몸의 병을 치료하시기 전에 죄사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예수가 중풍병자를 치료할 수 없으니까 사람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죄 용서를 선언하면서 스스로 대단한 척 하고 신성모독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네가 죄사함을 받았다.’라는 말과 일어나 걸으라.’는 말 중에 어떤 것이 쉽겠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럴 듯한 말로 사람들을 속이기에는 네가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이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능력이 있는 척 하려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죄용서인 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시자 서기관들은 당황했습니다. 예수님이 병자에게 처음 말씀하신 죄 용서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말장난이 아님을 그 중풍병자의 몸이 확증했습니다. 8절을 보면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그런 권능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그들이 인정했다는 의미로 보면 긍정적인 반응 같지만, 예수님이 죄 용서를 하시는 주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그쳤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즉 그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죄를 꿰뚫어보고 심판하실 수도, 용서하실 수도 있는 분임을 알았다면 벌벌 떨면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판단할 수 있는 척 했지만 오히려 예수님이 그들의 속을 아셨습니다. 속에 있는 병과 악한 생각과 죄를 아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단지 지식을 늘어놓은 분이 아닙니다. 그저 훌륭한 지혜와 교훈과 도덕으로 인간의 모범을 보이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결코 할 수 없는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셨고, 자연을 통제하셨고, 귀신들을 통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예수님이 나타내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능력은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죄 문제를 예수님은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의술이 발전하면 많은 질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인들도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해서 풍랑 같은 자연재해를 피하거나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 보이신 재앙들을 어느 정도까지는 이집트의 술사들도 따라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인간은 이전에 없던 많은 능력들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발전해도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의 본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정확히 아실뿐 아니라 그것을 해결하시고 용서하실 수 있는 권한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병 고치는 것과 죄를 사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쉽겠습니까? 속이길 잘 하는 사람에게는 말로 때울 수 있는 죄 용서가 쉽고, 실제적 능력을 베푸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병 고치는 것이 쉬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할 자들도 병을 치료해주실 수는 있습니다. 귀신들의 간구를 들어주실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사람이 원하는 육신적 문제를 그냥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의 문제만은 쉽게 해결하실 수 없습니다.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자신의 거룩한 본성상 죄를 공정하게 해결하지 않고는 그냥 용서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용서하는 것은 주님께 어렵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죄인의 신분을 벗는 것은 우리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그 어려운 일을 가능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당할 것과 죽음을 근거로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의 죄가 용서된 것이 그의 질병이 치료된 것보다 더 기적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어떤 놀라운 경험을 많이 할지라도 우리 자신의 죄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으로서 알지 못한다면, 죄 용서의 권능과 권리를 가지신 분임을 알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오늘 본문에 등장한 사람들처럼 반응할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고생할 것 때문에 주저하게 될 것입니다. 또 제자들이 풍랑을 보고 두려워 한 것처럼 우리는 세상 속에서 죽을 위험 때문에 두려워 할 것입니다. 또 돼지를 기르던 자들처럼 자기에게 손해가 생기면 예수님을 멀리할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만 우리를 용서하실 능력과 권한이 있음을 알 때, 나의 죄를 대신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을 알 때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