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늘 찾는 이가 적을 좁은 문 (마 7:15-29)

따뜻한 진리 2017. 12. 17. 22:51

마태복음 7:15-29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 마지막에서 우리에게 자신의 가르침대로 살 것을 요청하시는 동시에 많은 자들이 엉뚱한 길을 선택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과 넓은 문,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와 불법을 행하는 자, 모래 위의 집과 반석 위의 집으로 비유를 통해 대조하시면서 주님의 편에 서지 않는 자들이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의외로 많은 자들이 망하는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 길로 가는 문은 넓고, 사람들이 양의 탈을 쓴 거짓 선지자들에게 잘 속고, 눈에 드러나는 능력과 업적이 마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처럼 보이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 쉽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면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22절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지 않았냐면서 당황할 것이라고 나옵니다. 주님이 가리키신 길은 좁고, 찾는 이가 적고, 힘겹게 반석 위에 기초를 세워서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대조는 예수 믿는 사람과 예수 안 믿는 사람을 비교하신 것이 아닙니다. 망하는 길에 속하는 일련의 비유들 신앙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나름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해당됩니다. 즉 본문은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는 자들 중에서 거짓된 길을 추구하는 자들과 참된 길을 추구하는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를 믿는다는 자들 중에 많은 자들이 망하는 길로 갑니까? 멸망 받아 마땅한 자신의 본성에 대해 여전히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만큼 자신의 영혼이 부패하였고, 자신의 원하는 바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와 전혀 달라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가 폭로하는 자신의 실체도 보지 못하고, 십자가가 가리키고 명령하는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옛 본성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 하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온 가치관대로 넓고 쉬운 길,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거짓 선지자들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또 자기 공로와 욕망을 위해서 한 일을 주의 이름으로 했다고 꾸미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내용들은 우리의 본성과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신대로 팔복의 내면과 이타주의적인 희생,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주님만 아실 수 있게 행하는 신앙행위를 추구하면 재미없습니다. 내 잘난 맛을 볼 수 없습니다. 손해 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제시하셨는데도 모른 체하고 멋대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가르치시고, 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길을 갈 것이라고 경고하셨는데도 다수는 매력적인 멸망의 길을 선택하면서 거기에 구원이 있다고 속고 속이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 같고, 우리의 모든 이기적 본성들이 하나님으로 인해 채워져야 하는 것이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본성에 부합한다고 속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짓이라는 것은 15절이 말하는 대로 그들이 결국 양들의 것을 노략질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자신들의 성공을 위해 양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악하고 못된 행위, 즉 나쁜 열매를 맺어 스스로 못된 나무임을 드러낸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거짓 된 자들은 무엇이든 열심히 행하면 자신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결과가 좋으면 자신들이 행하는 놀라운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겠냐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겠냐고 말합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니 무엇이든 따라오고 순종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고 능력을 아무리 발휘해도 21절 말씀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면, 24절의 말씀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것이 아니면 예수님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거짓된 자들은 복음을 제시할 때 인간의 양심에 편하도록 왜곡해서 전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을 말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면 , 그로인해 진정 거듭난 사람이라면 선한 행위, 선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이 그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복음을 왜곡시킵니다. 자기의 공로를 의지하게 하거나 반대로 믿음을 빙자해서 방종하도록 합니다. 한쪽은 믿기만 하면 구원받으니까 삶이 어떻든지 안심해도 되는 것처럼 말합니다. 다른 한 쪽은 믿음으로 충분하지 않고, 착한 삶을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공로주의로 말합니다. 둘 다 거짓된 확신을 사람 안에서 만들어내는 속임수입니다. 그렇게 왜곡된 복음을 믿고 교인이 되면 편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마음을 안심시킬 수 있고, 공로로 구원받기 때문에 착한만큼 구원의 확신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하나님과 십자가의 복음을 모욕하고 무색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값싼 구원, 인간이 만들어낸 복음입니다. 쉽게 믿음이 생기게 하는 모래 위에 집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거듭나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의존하는 믿음을 가진 자라면 착한 행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을 닮고 따르는 과정에서 맺히는 열매인 착한행실은 우리의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다른 존재들에게 선을 드러내도록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된 목적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이 세상에서 불완전합니다. 산상수훈의 내용대로 완벽하게 살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삶으로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도는 구원받을 때 처음 믿은 것으로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일평생 더욱 그리스도를 의지하면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안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석위에 집 짓는 것입니다. 반석에 기초를 놓는 것은 인간적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가능케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