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1-1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앞으로 살필 8장, 9장에는 열 가지 이적들이 등장합니다. 이 이적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믿음과 제자도가 무엇인지도 말해줍니다. 산상수훈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권위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이적들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인간에게 해답을 안내하는 스승이나 선지자 정도가 아니라 답을 제공해주시는, 그 자신이 답이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본문에는 세 가지 치유 기적이 이어집니다. 먼저 나병환자가 깨끗해진 일입니다. 우리는 나병을 흔히 문둥병, 한센병으로 이해하곤 하지만, 성경에서의 나병은 주로 피부병을 말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사소한 피부병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치료하기 전후의 상태가 사람들에게 극적인 변화로 인식될 정도로 몸의 상당부분에 걸쳐 생긴 심한 피부질환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질병을 가진 자들은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않도록 주로 격리되었습니다. 단순히 전염의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부정을 막기 위해서 접촉을 경계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나병 환자는 대담하게도 예수님께 가까이 왔는데, 더 대담한 일은 예수님이 그 환자를 만지시고 치료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굳이 손을 대지 않으셔도 되는데, 일부러 손을 대고 치료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 하인을 살려달라고 찾아온 로마 백부장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했고, 자신에게 자격이 없음을 인식하면서 멀리 있는 자기 하인을 예수님이 말씀만으로 치료하실 수 있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백부장은 구원이 없는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그것과 비교되는 이스라엘의 본 자손들의 믿음 없음을 지적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의 내용이 탁월하기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단지 그 탁월함 때문에 그의 소원대로 종이 치료를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가졌어야 했었던 믿음이 이방인인 그에게 있었다는 것을 부각시키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낫게 하신 것과 귀신 들린 자들의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신 일입니다. 당시 여자들은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겨졌고, 그런 이유에서인지 베드로의 장모 자신이나 그 누구도 예수님께 치료를 요청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친히 찾아가셔서 손을 만지시면서 병을 치료하셨습니다. 또 모두가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영적, 정신적 문제를 가진 귀신들린 자들을 주님께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주님은 많은 병든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부정해지거나 병이 옮길까봐 아무도 만지고 싶지 않은 자를 예수님은 만지셨고, 유대인들이 구원이 없다고 여겼던 이방인 백부장이지만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그의 종도 치료하셨고, 관심 밖의 베드로 장모와 혐오대상인 귀신들린 자와 많은 병자들을 예수님은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제사장과 율법을 넘어서셨고, 유대인들의 민족주의를 넘어서셨고, 남성 중심의 사회적 한계를 넘어서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오히려 그들이 무시하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살아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혜택, 치유의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뻔히 보면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쫓겨나고 울면서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7장 28절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유대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않다’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또 말씀 뿐 아니라 예수님은 능력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능력을 치유라는 방법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치료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또는 치료 자체가 복음에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만약 치료 자체가 목적이고, 예수님을 믿게 만들 복음전파의 효과적 도구였으면 앞의 7장 22절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한 것이 소용없을 것이라는 말씀, 또 본문 8장 4절에서 나병을 치료해주신 그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말씀을 주님은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통제 속에서 치유 사역을 의도하셨습니다. 치유사역 자체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이해하고, 우리가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바르게 의지하도록 선택적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개인적 치료라는 방법을 사용하신 이유 중 하나는 유대인들의 기대와 차별되는 예수님 자신의 구속 사역을 분명하게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어벤져스 같은 메시아를 기대했던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우습게 여기는 자들의 개인적 문제나 해결해주는 예수님이 탐탁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치유라는 방법을 선택하신 또 다른 이유는 17절의 말씀대로 사람의 연약함과 질병이라는 육체적 문제를 다루심으로써 근본적인 죄의 문제, 영적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실 것을 깨닫도록 의도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귀신을 내쫓으시면서 그 의미를 더 부각시키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영적 문제 때문에 육체적 고통과 죽음이라는 육적 문제를 겪게 된 것처럼, 반대로 주께서는 육신의 고통과 죽음을 다루시면서 자신이 그 근본적인 원인인 영적문제의 해결자임을 사람이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오해하면서 마음대로 주장하지 않게 하고, 예수님 자신이 이루실 죄로부터의 구원을 깨닫도록 치료라는 방법으로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한 영혼 한 영혼 병이 낫듯이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구원 얻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육체적 질병과 여러 고통이 해결되도록 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런 고통들을 가능한 많이 해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마다 모두, 즉시 능력을 드러내 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고통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11절, 12절에서 예수님은 몸의 문제들을 해결하시는 와중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들과 들어가지 못할 자들을 대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릴 때, 낫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주님께 달려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원하시면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한 나병환자와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한 백부장처럼 말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하고, 우리는 정직히 구하고 매달리지만 결정권은 주님께 달려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치료 안 해 주시는 것이 예수님이 무능하시거나, 사랑이 없으셔서가 아닙니다. 믿음이 없어서 치료하지 않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치료가 유익할지 판단하시고 허락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장 죽을 것 같은 고통을 해결해 주지 않으셔도 그것이 주님의 주권이라고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정말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거절하지 않으시고 이미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고 피부로 경험되어지는 죄로 인한 고통을 피하는 것보다 더 긴박한 것은 아무리 고통을 받아도 해결되지 않는 우리의 죄 자체입니다. 육신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고통보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죄에 대한 진노와 형벌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 겪는 죄의 고통들, 질병과 가난이 무섭고 고통스러운 만큼 우리 죄의 문제는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과 고통이 달린 그 죄 문제를 해결하시려 오신 구주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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