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35-11:1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은 목자의 역할을 하기보다 양들을 잘못 인도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마저 방해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서 사역을 하도록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육신적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떠나신 후 제자들이 계속해서 해야 할 일들을 미리 가르치시기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할 때 인간적인 기대와는 달리 반대와 핍박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초대교회와 역사 속에서 일어나게 될 일들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복음 전파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예수님은 자신이 베풀던 치료의 능력을 제자들에게 주셨고, 어떻게 행해야 할지 그리고 어떤 자세로 다녀야 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다니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다니기 위해 필요한 재물들을 준비해서도 안 되고, 치료해준 대가를 요구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오직 복음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자들이 자발적으로 베푸는 것으로 공급 받으면서 다녀야 했습니다. 만약 어떤 지역에서 복음을 대적하면 거기서 신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는 상징적 행동을 보여 그들이 복음을 거절한 일이 심각한 것임을 보여주고 떠나야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음만 거절할 뿐 아니라 제자들 역시 핍박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흠 잡힐 일 없이 도덕적으로 처신해야 했고, 지혜롭게 위험을 분별하고 피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할지라도, 미움 받을 일을 하지 않을지라도 대적자들은 복음 전하는 제자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잡아가고, 때리고, 가두고, 죽는 데까지 넘겨 줄 것이고, 또 가슴 아프게도 가족들이 그런 핍박의 주체가 되는 일도 일어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제자가 스승을 따라 가는 것처럼, 종이 주인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이 당하신 일을 그대로 당하는 것이므로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런 고생을 하다가 죽을 수 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언젠가는 자신이 오실 것을 기억하면서 인내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는 역설적인 내용들이 가득합니다. 천국이 임했다고 복음을 전하지만 실상 제자들은 고난을 당합니다. 제자들은 가장 좋은 것을 주려는데 세상은 가장 공격적인 반응을 합니다.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하려고 복음을 전하는데 가장 큰 분쟁이 일어납니다. 가장 사랑해야 할 가족이 가장 큰 원수가 됩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으면 삽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을 아는 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아는 자가 겪게 되는 삶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사이에 성도들이 끼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 나라가 타락한 세상 가운데 임했기 때문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싸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양들이 그런 일을 당할 것을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황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 당하는 것이 예수님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주께서 당하는 모든 것들을 지켜보신다고, 반드시 헛되지 않게 하실 것이니 인내하라고 격려하신 것입니다.
복음으로 인한 이런 고난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이런 고난이 전도할 때 선교 지역에서 여전히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상당수의 고난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고난이 아닌데 복음으로 인한 고난이라고 착각하는 일이 많습니다. 자기 잘못 때문에 당하는 고난인데 복음 때문에 겪는 고난인 것처럼, 사탄의 세력 때문에 이유 없이 핍박을 당하는 것처럼 포장하는 일들을 흔히 봅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비둘기인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또 마땅히 피해야 할 곳을 어리석고 분별력 없이 접근해서 고난을 겪기도 합니다. 기독교에 적대적인 위험 지역, 분쟁지역에 들어가서는 고난당하는 것이 마치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것처럼 포장들을 합니다. 그것은 뱀처럼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성경 들고 들어가서 죽는다고 해서 다 순교는 아닙니다. 죽는 순간 예수님을 생각한다고 해서 순교는 아닙니다.
복음으로 인한 고난이 진실하려면 어떠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가 진실한 복음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은 지식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았고, 생명에 담겨서 우리에게 왔습니다. 사랑은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 담겨서 우리에게 복음이 왔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한 방식대로 제자들의 생명에 복음을 담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영접하느냐 거절하느냐는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느냐 거절하느냐로 예수님께서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자신을 영접한다고 해서 우쭐하거나, 거절당한다고 해서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인내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니 자신도 자기 생명에 그리스도를 담아 다른 영혼들을 사랑하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복음전도는 그리스도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고, 가장 귀한 생명임을 아는 것에 기초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전하는 자의 자기 사랑과 자기 생명을 버리게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달하게 만듭니다. 그럴 때 복음으로 인한 진실한 고난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귀한 복음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부터 전하는 것이 당연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가족에게 먼저 예수 믿으라고 말한 적도 없으면서, 선교 가서 영혼들 구원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물론 가족에게 복음 전했는데 안 믿어도 선교를 떠날 수 있고, 자기가 속한 나라가 이미 복음화 되어서 외국으로 갈수도 있지만 사람은 영적으로 가장 좋은 것을 육체적으로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주고픈 것이 본성입니다. 복음 전파에서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지 상식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늘 자기 앞에 있는 자들에 대한 부담이 먼저 작용해야 정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먼저 복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가족 안에서 일어날 다툼과 고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사도들에게 유대 땅에 먼저 전하라고 하신 것은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는 차원에서, 또 선교적인 차원에서 다른 의미들이 있지만 혈연적 관계상 가까운 자들에 대한 사랑의 본성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생명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참된 복음에 진실하게 반응하는 자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거절당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는 어딘 가 숨어있을 주님의 양을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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