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2-30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본문은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당시 로마의 허락 하에 유대지역을 다스린 왕은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죽이려했던 헤롯대왕의 아들인데 이복형제의 아내 헤로디아와 재혼을 하자 세례요한이 비판을 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감옥에서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께 질문한 것은 “오실 그 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합니까?”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한 일에 있어서는 탁월하게 쓰임 받았으나 예수님을 이해하는 것에는 부족했습니다. 물론 당시 유대인들이 다윗왕국을 회복시킬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한 것과 달리 세례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좀 더 나은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죄의 문제를 다루시는 심판의 주체이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고,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임박한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헤롯 안티파스 같은 악한 자들이 곧 심판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비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악한 자들에게 공의로운 심판을 실행하지 않으시고 약한 자들을 고치시는 의외의 일만 하시니까 감옥에 갇혀 있는 세례요한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인정하시고 칭찬하셨지만 그의 한계와 그의 실망에 대해 지적하셨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필요대로 예수님을 기대한다면 예수님에 대해 실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12절에서 예수님은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 구절을 천국이 침노하는 자들의 것이라고 해석해서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강력한 열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이 선포하기 시작해서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드러내신 그 하나님 나라가 정말 가까이 임했지만 악한 자들에게 공격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해서 즉시 악인들이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엘리야가 고난당했듯이 세례요한도 고난당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고난당하다가 어떻게 죽을지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그런 부족한 이해에 대해 말씀하신 것에 이어 그 당시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 무지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금욕을 한 것을 미친 것이라고 비난하더니, 그것과는 정반대로 예수님이 죄인들과 교제를 하시면서 기쁨을 나누시니까 수치스럽고 천박한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이 지각이 있었다면 세례요한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슬퍼했을 것이고, 예수님을 통해서는 자기들의 죄가 해결되고 구원이 임한 것으로 기뻐해야 할 것인데 사람들은 어느 것에도 정당한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목격했지만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은 무지, 무감각, 강퍅함 때문에 구약에서 심판받았던 소돔보다 더 큰 심판을 당할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듣고, 예수님에 대해 안다고 하지만 정작 예수님이 알려주려 하신 본모습을 제대로 알게 된 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27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예수님이 바라시는 대로 예수님을 아는 자가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드러내신 자기 이해보다 ‘하나님이라면,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하셔야 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모두가 행복하게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공의로운 하나님이라면 악한 자들을 심판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 능력의 하나님이라면 기적을 보여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사람의 기대는 하나님에 대한 실망을 가져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진실하게 아는 자,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죄인임을 아는 자가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아채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어떤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육체적 문제를 다루시면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런 죄인들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용서를 경험하게 하신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놀라운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 예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가까이 하신 것, 예수님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알게 되고, 그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지각, 깨달음은 사람의 능력으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지혜롭게 똑똑하다는 자들에게는 이 복음의 비밀을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사람의 능력과 노력으로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에 28절처럼 예수님이 내게로 오라고 초청해서 불러주시고, 자신을 드러내주셔야만 우리는 예수님이 내게 필요한 분이신 줄, 내게 전부가 되시는 줄, 하나님이신 줄 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그 부르심,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주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 안에서 신앙에 관한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달으나 그것은 지식에 머물 위험이 항상 있습니다. 결국은 아이처럼 겸손하게 예수님을 의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더욱 알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또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멍에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더욱 알기 위함이며, 주님을 끝까지 따르기 위함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부과한 짐들은 우리를 멸망으로 이끕니다. 이렇게 하면 행복할 것이라면서 세상이 우리에게 짐 지운 것들, 또 자기만족과 양심을 위해 스스로에게 부과한 어리석은 짐들을 내려놓고, 예수님이 자신을 계속 따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지우시는 멍에를 지는 것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지속되는 문제들 때문에 조바심을 갖고, 예수님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더욱 의지하게 만드는 줄 알고 주님을 더욱 신뢰하면서 인내하면서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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