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5:1-21
본문은 하나의 예배로써 불려진 노래이자 낭독된 시이고, 모세와 미리암의 주도로 고백된 내용입니다. 1절에서 18절은 모세의 노래이고, 19절에서 21절은 미리암의 노래인데, 미리암의 노래는 모세의 노래 첫 구절을 반복하는 후렴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 노래의 중심 이미지는 애굽 군대가 홍해 물 속에 덮여 죽게 된 장면이고, 주제는 그런 일을 행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으로 인해 백성들이 구원의 은혜를 입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몇 구절을 살펴보면 먼저 1절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애굽 군대는 ‘말을 탄 자’로 묘사됩니다. 그것은 애굽이 실제로 말을 중요한 이동수단과 공격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뒤에 나오는 21절 미리암의 노래가 앞의 1절의 반복이므로 당연히 ‘말을 탄 자’가 반복됩니다. 이렇게 1절과 21절, 또 중간의 4절 모두 애굽 군대가 던져졌다고 표현합니다. 애굽 군대는 홍해바다에 던져지지는 않았습니다. 4, 5절을 보면 분명 모세는 애굽 군대가 물에 잠겼고, 물이 덮었고, 가라앉았다고 말합니다. 10절에서도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거센 물에 무거운 납덩어리 같이 잠겼다고 말합니다. 분명 모세와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애굽 군대들을 바다에 집어던지신 것을 본 것이 아니라 홍해 바다에 빠져죽게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애굽 군대는 홍해 바다 물에 빠져죽은, 물에 덮여서 죽은 것인데 왜 홍해에 던져진 것으로 표현했을까요?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당한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애굽왕 바로가 히브리인 남자아기가 태어나면 죽이라고 했는데, 산파들이 아기들을 살리자 어떻게 명령했습니까? 나일강에 던지라고 말했습니다. 그 나일강에 던져짐은 이스라엘 남자아기들에게 행해진 일이었고, 모세에게도 있었던 일입니다. 즉 모세는 과거에 악행을 저질렀던 애굽이 이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전되어 자신들이 저질렀던 방법으로 멸망당한 것처럼 묘사한 것입니다.
그렇게 애굽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던 그 방식으로 동일하게 처벌받는 이미지는 본문의노래가 단지 모세의 노래가 아니라 모세와 미리암의 노래라는 사실에도 담겨져 있습니다. 미리암이 누구입니까? 바로의 명령대로 어쩔 수 없이 아기 모세를 나일강에 띄워 보낸, 동생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누나입니다. 모세와 미리암은 그렇게 바로에 의해 비참한 순간을 겪었던 당사자들로서 이제 하나님에 의해 역전된 순간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냥 노래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역사를 가지고 노래했습니다. 지난 날과의 대조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것이 또 어디에 나타났는가 하면 5절에서 애굽 군대가 돌처럼 가라않았다고, 7절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지푸라기같이 불살라진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생했던 때를 상징하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가 가장 극심한 노동으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던 때에 벽돌을 굽게 하고, 거기에 필요한 지푸라기까지 구해오라고 했었는데(5:12), 애굽이 이스라엘을 착취해서 얻고자 했던 그것들이 이제 그들을 심판을 묘사하는 이미지로 사용된 것입니다. 애굽은 벽돌과 짚으로 이스라엘을 고생시켰는데, 이제는 그들이 그런 벽돌처럼, 지푸라기처럼 멸망했습니다.
모세는 그런 심판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저 자연재해나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능력을 베푸셔서 애굽을 징계하셨기에 애굽이 홍해에 던져진 것입니다. 그래서 6절과 12절을 보면 ‘주의 오른손’이 부수셨고 땅을 움직이신 것으로, 8절을 보면 ‘주의 콧김’이 바다의 물과 바람을 일으킨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신체에 빗댄 표현은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고 악을 징벌하시고, 자기 백성의 억울함과 슬픔을 몸소 씻기시는 분임을 말합니다.
모세와 미리암이 이 노래를 이스라엘과 부른 이유는 한 나라의 노예였던 자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승리와 자유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해야했습니다. 세상의 위대한 나라 앞에서 초라했던 주의 백성들을 누가 이끄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나오는 것을 방해하고 사망 아래 붙잡아두려던 애굽,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물에 던졌던 애굽을 하나님께서 홍해에 던지셨습니다. 주께서 악한 애굽을 자기 백성과 단절시키셨습니다. 더 이상 자기 백성들을 농락하지 못하도록 치명타를 날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보다 자신을 섬기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속인 애굽을 부수셨습니다. 이 노래 속에서 하나님이 그런 일들을 하시는 동안 이스라엘은 무엇을 했습니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고분고분 따라오기만 한 것도 기적입니다. 애굽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정도로 노예근성에 젖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정말 인간은 자신의 상태도 모르고, 위험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 수 있는지도 모르는 어린 아이와 같고, 하나님은 정말 아버지이십니다.
인간은 자기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면서 살아가겠다고, 자기 결정권이 있다고, 자기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자부하지만 실상은 마약에 취해서 노예로 붙들려 있는 자와 같습니다. 어릴 때 외딴 곳에 끌려와 세상과 차단된 채로 짐승처럼 착취당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고, 저항할 줄 모르고, 오히려 자기를 구원해주는 손길들을 당황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때때로 발견되는 것처럼, 인간은 그렇게 자기가 처한 상황을 분별하지 못한 채 자기를 길들여 온 세상 속에 남기를 바라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는 과정에서 애굽을 홀로 상대하셨고, 이스라엘은 그런 과정에서 그저 하나님의 일하심을 지켜보면서 구원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와 미리암의 노래는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탄 마귀를 십자가에서 그렇게 홀로 이기셨습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기 이전에, 우리가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진정 사람답게 살기 위해 누구에게로 가야하는지를 알기 이전에,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외치기 이전에,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통해 사탄의 권세를 부수셨습니다. 십자가 주변에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몰랐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꼭 필요한 일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 이루신 그 십자가 앞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뭘 모를 때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일방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죄인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전적인 수행자이시고, 백성인 우리는 전적인 수혜자입니다. 여호와는 행하시고, 백성은 노래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미리암의 이 노래는 홍해를 건넌 기쁨과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았을 때 만들어져서 온 이스라엘과 함께 불렸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회중은 출애굽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역사에 놀라 한껏 격양된 마음으로 그 노래를 따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노래를 광야생활 내내 부르면서 그 여호와 하나님을 계속해서 높이고, 영광을 돌렸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이 노래를 계속 기억하면서 자신을 경배하라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기록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진정 구원받은 자라면 처음 예수 믿게 될 때에 감격도 크지만, 날이 갈수록 자신이 얻은 구원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더 풍성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자신의 무지와 죄성을 더욱 깨달을수록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손을 쓰신 것에 감사할 것입니다. 내가 뭘 몰랐을 때 부르셨고, 앞서 행하시고, 예비하시고, 내가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에 대한 더 깊은 감사를, 더 감격스런 찬양을 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인식하는 자만이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 노래와 같은 확신이 있는 자만이 구원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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