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4:1-3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 앞에 장막을 쳤는데, 애굽왕 바로에게는 그것이 독안에 든 쥐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오도 가도 못하는 갇힌 상태가 되었습니다. 바로는 역전의 기회인 줄 알고 군대를 이끌고 왔습니다. 바로가 동원한 병거는 사람이나 말이 끄는 바퀴달린 수레인데, 지금의 전차였습니다. 바로는 그런 병거 육백 대와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잡으려고 움직였습니다.
애굽 군대가 가까이 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으로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이집트에 우리를 묻을 곳이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로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이냐? 이집트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미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느냐?’라면서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바로의 완고함만큼이나 이스라엘의 불신도 대단했습니다. 애굽의 바로는 열 가지 재앙을 경험했으면서도 홍해 앞에 이스라엘을 둔 여호와가 자기 백성을 책임지는 행동을 계속해서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이스라엘은 같은 재앙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을 특별히 여기신 것을 경험했지만 홍해와 애굽 사이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살리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은 기억력은 짧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적절하며, 적극적이었는지 분명히 경험했어도 새롭게 닥친 상황의 위력 속에서 인간은 영적 치매를 드러내면서 두려워합니다. 바로나 이스라엘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큰 물결 속에서 예수님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나를 줄곧 인도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자기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줄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은 내가 고통당하지 않게 해야 마땅하다고 요구합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모세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두려워 말라,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모세가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마도 여호와와 모세를 원망하면서 애굽 사람들에게 항복의 표시를 할 준비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 싸우심을 지켜보라고, 기다리라고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점점 다가오는 애굽 군대를 보면서 초조함과 불안 속에서 믿음을 배워야 했습니다. 자신들의 상황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어느 순간 이스라엘 앞에 있던 불구름기둥이 뒤로 움직여 애굽 군대와 이스라엘 사이의 경계를 만들었습니다. 그 기둥이 애굽 군대의 접근을 막는 동안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홍해를 향해 밤새도록 손을 들고 있었고, 홍해 물이 갈라져서 길이 생겼습니다. 그 길은 분명 바다 사이의 갈라진 길이었습니다. 성경의 이적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건넌 곳이 홍해 바다가 아니라 개울처럼 얕은 개천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는 전남 진도에서 조수간만의 차로 물이 빠져서 바닷길이 생기는 현상 같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21절과 29절은 반복해서 갈라진 바다 양쪽이 벽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본문이 말하는 갈라진 홍해가 바지를 걷고 건널 수 있는 개천이었고, 밀물과 썰물 효과였다면 애굽 군대가 그 물에 빠져 죽었다는 말은 더 믿을 수 없는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즉 홍해 사건의 어떤 요소를 과학적으로 해석하려하면 전체가 허구가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깊은 사람이 빠져 죽을 깊은 물을 가르셔서 그 사이를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라진 홍해를 모두 건너자 홍해 물은 꽤나 빠른 속도로 다시 흘러 들어왔고, 그곳으로 따라 들어와 추격하던 애굽 군대는 불구름 기둥에 의해 혼란을 겪다가 도망치려 했지만 죽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13절이 말하는대로 백성들은 더 이상 애굽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보이는 애굽인들은 단지 홍해에 떠다니는 시체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저 시체들처럼 될 수도 있었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결코 건너올 수 없는 곳에 어느새 서 있음을 서로가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원망하고 불평하고 불안해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출애굽 시켜서 새로운 곳으로 옮겨 놓으셨습니다. 14절이 말하는 대로 그 모든 일 가운데 백성들은 정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널 자격이 없었고, 그들이 본 것들을 볼 자격이 없었습니다. 홍해 앞의 죽을 위기 속에서 그들이 자연스레 실토했듯이 그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노예생활을 했지만 애굽을 떠나봐야 더 고생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애굽은 누구나 이민 가고 싶은 선진국이었습니다. 애굽에서 사는 것은 현대 한국인들이 미국, 캐나다, 호주 같은 선진국에 가면 여기보다 비주류가 되고 고생을 해도 만족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나타났을 때 잠깐 좋아했다가 원망을 했고, 홍해 앞에서도 원망을 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을 원한 것이 아니라 그저 노동 환경이 좀 개선되길 바랐을 뿐 애굽 생활에 나름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완전히 나오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구원은 자신들이 누렸던 것을 그대로 놔둔 채 싫은 것들만 일부 조정해서, 바로 잡아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자의 삶을 흔드셔서 하나님 보다 우위에 있는 것들, 하나님보다 만족으로 여기는 것들이 부질없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것을 위해 의존하던 그것들과 단절시키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출애굽하면 더 좋아지길 기대했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고통에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3절에서 바로가 말한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홍해 앞에 광야에 갇히도록 몰아넣으셨습니다. 일부러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죽음의 시련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갈라진 홍해를 건너는 일은 신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를 죽이려고 광야로 나오게 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는 자들이 모세를 따라 갈라진 홍해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까? 그들은 애굽 군대와 불구름 기둥에 떠 밀려서 들어갔을 것입니다. 홍해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을 뻔한 일을 겪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을 보면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라고 말합니다. 세례가 죽음을 의미하듯 그들은 정말 죽음을 지난 것입니다.
구원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죽었다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홍해를 통해 가르쳐주셨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다고 해서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거듭남은 육체적으로 죽을 뻔한 일을 당한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살아나야 합니다. 홍해를 건넌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죽음을 통한 길을 마련해 주신 것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애굽과의 단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바다를 건너는 일을 경험해야 했고, 그런 과거에 대해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홍해는 죽음이었습니다. 나아가 홍해를 건넜다고 해서 죽을 일이 끝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삶에 젖어 있을 때에 몰랐던 것들, 죄악들을 계속 발견해 나가면서 옛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사는 과정, 광야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도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자의 삶은 세상이 살 길이라고 가리키는 곳에서 나오는 것이고, 분명 죽을 위기인데 살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고, 결국 모두에게 비참한 죽음이 임하게 될 때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이끄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다루신 것이 옳으셨구나 하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인생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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