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창세기 강해 (53) 창세기 36:1-43

따뜻한 진리 2023. 5. 7. 15:00

창세기 36:1-43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본문은 에서의 후손들이 번성하고 발전한 것을 말합니다. 앞의 33장 야곱이 에서를 만나는 장면에서도 언급했지만 에서는 야곱이 주려는 선물이 필요 없을 만큼 이미 부유했었고, 야곱보다 먼저 큰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6절에서 8절을 보면 에서의 재산과 가축이 많아서 야곱과 함께 살 수 없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13장에서 아브라함과 롯이 서로의 소유가 많아 함께 할 수 없었던 이유와 유사합니다. 15절부터는 에서의 후손들 중에서 많은 족장들과 왕들이 나왔음을 말합니다. 31절을 보면 이스라엘에게 왕이 있기 전에 에서의 후손들 즉, 에돔 족속 중에 이미 왕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본문은 야곱 즉 이스라엘의 후손들보다 에서의 후손들이 더 빨리 번성하고 강력해졌음을 말합니다.

 

    에서는 복을 받았습니다. 많은 자손과 넓은 땅을 얻었습니다. 에서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니 그와 그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입니다. 분명 에서나 그의 후손들도 문제가 있었고,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본문은 에서가 번성한 내용만 축약해서 전달함으로 본문 앞뒤에서 일어나는 야곱 가정의 문제들과 비교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장자권까지 얻은 야곱보다 그렇지 않은 에서가 더 잘된 모습을 볼 때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우리가 생각하게 합니다. 선택받지 못한 에서의 가정이 잘된 것에 비해 선택받은 야곱의 가정은 순탄치 않은 일들을 겪었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것이 선택받은 사람에게 어떤 유익이나 장점이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영적인 복이 세상의 어떤 복보다 귀한 것이라고 인정하지만 한편으로는 성공하고 유력해진 에서와 같은 사람들을 부러워하곤 합니다. 이스라엘 역시 에서의 후손들을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왕을 달라고 요청했던 요인 중의 하나로 에서의 후손들인 에돔 족속의 왕과 국력이 부러움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바람 잘 날 없는 야곱 집안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중에 부러움을 살만한 형 에서의 가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택받지 못한 자의 번영을 부러워하지 않고 선택받은 자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지 이스라엘에게나 우리에게나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인물을 선택하셨다는 것, 어떤 인물이 하나님께 선택받는 것은 그저 세상적 복을 받아 잘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신이신 하나님께 선택받았으니 앞으로 내가 가는 길에 방해하는 것들이 없고, 모두가 무릎을 꿇고,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자신이 창조주이자 심판자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상태에서 생명을 얻고, 자신들의 죄로 자처한 곤란한 상황에서 많은 재물도 얻게 된 것은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허락하시는 창조주이심을 드러내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이 죽음에 처하게 되거나, 멀리 떠나보내거나, 악행에 휘말리게 되는 일들은 약속이 좌절될 위기, 멸망하고 사라지는 절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렇게 선택받은 자,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세상 가운데 저주받고 죽임당하는 심판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선택받은 자는 하나님이 누구시고, 어떤 식으로 일하시는가를 그 자신이 경험하기도 하고, 세상에 드러내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인류 중 처음으로 선택된 아담은 창조되어 풍요로운 에덴을 선물로 받았지만 선악과를 먹은 죄로 인해 이대로 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를 만났습니다. 선택받은 야곱 역시 부요해졌으나 자신의 문제나 자녀들의 문제로 망할 위기를 겪었습니다. 선택받은 나라 이스라엘도 위대한 나라가 되었으나 전쟁으로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 사라질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조차 자신들이 선택받았지만 거의 멸망한 비참한 공동체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하나님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지 혼란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약속된 메시아가 줄 소망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들었던 것입니다. 신약에서 선택받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불안을 겪고 당황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십자가에 죽으시면 자신들은 버림받은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약속된 후손이신 분이 죽임당하신다면 선택받은 제자인 자신들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막으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이 초라하게 된다는 것은 인간의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자신을 따르던 자들에게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역시 엄청난 성장을 했지만 엄청난 핍박도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창조해 내기도, 만들어 내기도 하시고 사라질 위기도 겪게 합니다. 그런 일은 아담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있었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의 역사에서도 계속됩니다. 이러한 선택받은 자들의 번성과 위기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알리시는 기회가 됩니다. 그냥 두면 망할 수밖에 없는 약하고 결점 많은 자들, 마른 뼈와 같은 자들이 생명을 얻고 세력을 얻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창조였습니다. 죄로 타락한 세상 가운데 자기 백성을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이 드러나신 역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선택된 자기 백성에게 고통과 멸절의 위기도 주셔서 세상의 심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자기가 선택한 자기 자녀들도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데 선택받지 못한 자들, 하나님을 무시한 채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 심판으로 주어질 것을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죄 없는 자기 아들도 죄인들을 대신해 심판과 고통에 처하게 하신 이가 자기 대적들은 자비 없는 고통에 처하게 하실 것을 예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드러내 보이시고 예고하시려고 하나님은 어떤 자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단지 구원만 하시려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시고 심판자이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일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사용되게 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창조의 원래 목적이었으니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야곱이 자기 인생 중에는 선택받지 못한 형 에서보다 열세였던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소용없다고 여기고 낙심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이 위대해졌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능력을 발휘하시고 약속을 지키셨다고 흥분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또 시간이 지나 이스라엘이 다시 망하고 포로로 끌려갔다고 해서 하나님이 버리셨다고 원망할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모든 상태를 통해 항상 자신을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가문이나 나라 역시 흥망성쇠를 겪지만 그들이 잘 될 때 스스로 축하하는 것과 망해갈 때 ‘인생은 죽음이 있어 아름다운 것, 실패가 성숙을 가져온다’며 자기 위로를 하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 채 아무리 심오한 의미를 부여해봤자 헛된 것이고, 가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사용하시는 것이 선한 것이지,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자신들의 부침을 미화하는 것은 넋 나간 자가 웃었다가 울었다가 하는 것 같은 허망한 일의 반복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로서 뭔가 자랑할만한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하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하심이 세상이 부러워할 만한 것을 우리에게 안겨주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기도 하시고, 고난도 당하게 하시는 분이 결국에 우리도 영광스럽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통해 그것을 확인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하신 약속을 긴 시간 속에서 이루시는 하나님, 지금도 이루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