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7:12-3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야곱의 아들들이 양 떼를 데리고 세겜으로 갔습니다. 그곳은 디나의 강간 사건 때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부족을 전멸시켜서 주변 부족들에게 복수 당할 것을 야곱이 두려워했던 곳입니다. 야곱은 걱정이 돼서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요셉을 보냅니다. 그때는 지도도 통신수단도 없었기에 낯선 곳에서 사람을 찾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마침 어떤 사람이 헤매는 요셉을 먼저 보고 말을 걸어왔습니다. 요셉이 양치는 형들을 본 적이 있냐고 묻자 그 사람은 형들이 어디로 가는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면서 위치를 알려주었습니다. 이 신비로운 사람의 등장과 개입한 타이밍은 본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게 일하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요셉은 다행히 형들에게로 가까워졌고 형들이 요셉을 먼저 발견합니다. 형들은 꿈꾸는 자가 오고 있다면서 요셉을 비웃었고 그를 죽여서 구덩이에 던지려 했습니다. 그러자 첫째인 르우벤이 생명을 해치지는 말고 그냥 구덩이에 던져넣자고 말립니다. 그는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요셉을 아버지에게 돌려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리더십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형제들은 요셉이 오자 그의 채색옷을 벗겨서 구덩이에 던져넣었습니다. 24절에서 구덩이에 물이 없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당시 구덩이가 빗물을 저장하는 우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구덩이에 물이 없었으니 요셉이 거기에 빠져 죽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놔두면 그 안에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셉을 그렇게 구덩이에 가두어 굶어 죽게 하면서도 형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식사를 했습니다. 마침 낙타를 타고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이 보이자 유다는 요셉을 팔자고 의견을 냅니다. 유다가 요셉을 살리려 한 것인지, 돈을 벌기 위해서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은 이십에 요셉을 넘깁니다. 형들은 요셉의 옷에 염소의 피를 묻혀서 아버지에게로 갔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죽은 줄로 알고 슬피 울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야곱이 자기 아버지와 형을 속였던 것으로 자기도 속은 것을 보게 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염소의 피를 요셉의 옷에 적셔서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장자권을 가로챌 때 어머니의 말대로 아버지 이삭을 속일 음식을 만들려고 염소를 사용했는데(27:9) 이제 요셉이 죽었다는 거짓말에 자신이 속을 때도 염소가 사용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속인 야곱은 자기 아들들에게 속는 아버지가 됩니다. 그렇게 야곱은 가장 사랑하는 라헬도 잃고,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도 잃습니다. 그렇게 야곱은 노년에도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았습니다.
본문에서 형들은 자신들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동생 요셉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보다 높아질 것이라는 요셉의 꿈 얘기에 시기와 분노를 품었고, 요셉을 없애버린다면 듣기 싫은 그 꿈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형들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적절한 타이밍에 요셉이 형들의 위치를 알려줄 사람을 만나게 하셨고,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36절에서 말하듯 하필이면 바로의 친위대장(경호실장) 보디발이라는 유력한 관리의 집에 팔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만드시는 과정에서 형들의 악함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섭리는 단지 요셉을 위한 일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일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나중에 요셉에게 엎드리고,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야곱 집안이 요셉 덕분에 살게 됩니다. 그러나 형제들이 요셉의 꿈을 경멸하며 죽이려 했듯,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형제와 같은 유대인 동족들이 그를 미워하고 죽였습니다. 온 세상이 기다려 온 왕, 진정 경배받으셔야 하는 예수님이신데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리스도를 죽이려 했습니다. 또 헤롯 왕은 예수님을 자기 적으로 여겨 죽이려 했습니다. 그렇게 요셉의 형제들이나 예수님 당시의 권력자들은 자신을 복되게 할 자를 죽이려 했습니다.
또 요셉의 형들이 처음에는 자기들 손으로 요셉을 죽이려 했다가 나중에 구덩이에 던져서 굶주림과 다른 위험에 노출시켜 죽게 했다가 다시 노예로 팔아서 다른 사람들의 손에 고생하다가 죽게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요셉을 죽이는 일이 악한 것임을 알았기에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자들 역시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제거하면서도 자신의 죄책감, 양심의 부담을 덜기 위해 헛된 죄명을 씌우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반대로 빌라도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서로 예수를 죽이는 책임을 미루었습니다. 또 요셉을 은 이십에 판 형과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제자는 유다라는 동일한 이름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당하실 일을 예고하셨습니다. 야곱의 특별한 아들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특별한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그 시대에 드러내길 기뻐하셨습니다. 형들을 위해 보냄 받은 요셉이 형들의 손에 버려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위해 보냄 받으셨으나 자기 백성의 손에 고난 당하셨습니다. 또 요셉이 아버지의 뜻에 충성한 것이 그에게 고난을 가져온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에 충성한 것은 고난과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다가 우리 때문에 고난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내용들 특히 구약의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비과학적이고 동화적인 해석이라고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구약의 인물들과 모세의 율법과 성막과 불구름 기둥과 만나와 어린양 같은 몇 가지 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의 시작과 끝, 생명과 활동과 죽음이 삼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알리고 죄인들에게 심판을 예고하고 있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이기에 애초에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잃은 죄인들이기 때문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옛적부터 알려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고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의 가르침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어떤 의미인지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건은 바로 그 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지나친 해석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목적, 즉 자기 아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가장 부합하는 해석입니다.
가요 가사 중 ‘내가 온 세상 주인공이 된 듯 꽃송이의 꽃잎 하나하나까지 모두 날 위해 피어났지’라는 노랫말이 말하듯 우리는 온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행복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합니다. 큰 우주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원자, 양자 하나하나까지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인식과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성경 인물들을 세상 위인처럼 여기며 성공이나 자기 계발의 모범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도록 돕는 모형들로 여길 때 참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 창조해 주신 모든 것들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들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풍성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더욱 믿게 하고, 그리스도를 자주 생각하며 기다리도록 만들어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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