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3:1-1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브니엘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밤새 힘겨루기를 한 야곱은 그 앞에서 죽었어야 하지만 살았고,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형을 만날 수 있는 마음을 얻게 됩니다. 브니엘 사건 이전에 야곱은 자기 무리 맨 앞에 에서를 위한 가축 선물을 두고 그 뒤에 자기 가족들을 두었습니다. 에서가 공격할 때 도망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족들을 더 나눠서 맨 앞에는 여종들과 그 자녀들을, 그 뒤에는 레아와 그 자녀들을, 그 뒤에는 라헬과 요셉을 배치했습니다. 그런 순서는 야곱의 사랑이 반영된 것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라헬과 요셉이 더 쉽게 도망치도록 맨 뒤에 둔 것입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무리의 맨 뒤에 있던 야곱이 맨 앞으로 나갔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를 만날 용기가 생겼지만 그래도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에서의 보복행위에 자기 때문에 가족들이 입게 될 피해를 줄이려고 그것도 자기가 사랑하는 자들이 보호되도록 계획을 세웠습니다.
분명 야곱은 절룩거리며 힘겹게 걸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을 향한 형 에서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앞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둘 사이가 가까워졌을 때 야곱은 에서를 향해 땅에 엎드려 절을 일곱 번이나 했습니다. 아마 그 순간의 긴장이 가장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달려와 야곱을 껴안았고 야곱과 에서는 서로 울었습니다. 야곱은 자기를 종이라고 형은 주라고 높였고,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가족들을 소개하고, 준비한 가축들을 에서에게 선물로 주려했습니다. 에서는 야곱의 선물을 처음에 거절했지만 야곱이 계속 권하자 못 이기는 척 받았습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자기가 거하는 세일 땅으로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야곱은 어린 자녀들과 가축들이 이미 지쳐 있으니 천천히 따라가겠다고 말하고는 에서와는 다른 길로 갔습니다.
이렇게 32장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보고도 살아남았고, 본문 33장에서도 형 에서를 보고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게 야곱은 죽을 뻔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일을 연속해서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에서에게 ‘형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죽을 고비를 두 번 넘기는 동안 겸손해졌습니다. 형 앞에서 종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가 단지 살기 위해 비굴한 태도를 보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형보다 복을 받고자 경쟁했던, 형의 복을 빼앗아 높아지려 했던 야곱이 자기를 종으로 낮춘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에서와 야곱이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내용은 본문의 시점에서 어떻게 된 것일까요? 리브가는 자기가 사랑한 아들 야곱이 하나님이 하신 그 말씀 속 어린 자로서 강한 자인 형의 섬김을 받길 바랐고, 야곱도 그것을 바라면서 형을 속였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야곱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리고 20년 만에 형 에서를 만났습니다. 짧은 만남 후 에서와 야곱은 각자 자기 길을 갔고 나중에 아버지 이삭이 죽을 때 잠깐 다시 만날 뿐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인생만을 두고 본다면 세상 관점에서 야곱은 에서보다 높아지지 않았습니다. 에서는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올만큼, 또 9절에서 야곱의 선물이 필요 없다고 거절할 만큼 부유해졌습니다. 반대로 야곱은 그런 에서를 두려워했고, 에서를 주인으로 높이며 자기는 비굴할 정도로 바짝 땅에 엎드렸습니다. 어쩌면 야곱은 자기는 부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일의 성공적인 마무리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와 반대로 형은 초라해져서 자신이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상대가 되어 있기를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형은 막강했습니다. 야곱은 에서를 높여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쯤에서 야곱이 장자권을 가로챈 행동이 정말 효과가 있었을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형 에서는 야곱에게 축복을 빼앗겼지만 인간적으로는 번성했습니다. 반대로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을 빼앗고 라반 아래에서 부유해졌지만 본문에서 형보다 높아지지 못했습니다. 야곱의 인간적인 속임수가 통하지 않은 것입니다. 겉으로는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것 같지만 빼앗지 못했습니다. 에서에게 장자권의 인간적 복은 유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보호하신 것처럼, 이스마엘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 것처럼 에서도 장자로서 크게 하셨습니다. 오히려 형의 복을 가져갔다고 생각한 야곱이 수많은 고생을 했고 형을 대면하는 순간에 그동안 이룬 것을 다 잃을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장자권을 두고 야곱이 한 과거 행동은 자신과 가족에게 고통을 더 안겨준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은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에게 ‘뱃속 아이들이 두 족속이 되어 한 족속이 다른 하나보다 강해지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 뱃속에서 이미 나누어져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질서와 관습은 먼저 태어난 장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차지하고, 힘이 센 자가 약자를 누르고, 빠른 자가 느린 자를 앞지르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 위에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 세상의 어떤 것보다 위에 있음을 보여주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가 들은 예고는 장자인 에서가 아닌 어린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을 이루고 근동지역에서 위대한 나라를 이루게 되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 높아짐은 돈과 힘과 사람의 지혜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의 삶 속에 개입하셨고, 그의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형을 피해 라반에게 도망칠 때 벧엘에서 나타나셨고, 라반에게 착취당할 때 얼룩진 가축들을 얻게 한 분이 자신이심을 알리시면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고, 에서를 만나기 전 브니엘에서 힘겨루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야곱이나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이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들이 높아졌습니다. 세상 나라들은 이스라엘이 크고 강한 나라가 된 것을 부러워했겠지만 이스라엘이 정말 기뻐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선택하시고 이끌어주시는 것, 함께 하시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랑스러워하고 만족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런 의미인지 모르고, 어떤 방법으로 그 선물이 자기에게 오는지 모른 야곱은 자기 생각과 방법으로 형의 장자권을 빼앗았지만 그것은 헛된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잘못 때문에 20년 뒤에 형으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겪어야 했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고생하면서 이룬 것은 그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뵙고, 두렵지만 겸손히 형을 향해 나아갔을 때 막상 형 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야곱을 끌어안았습니다. 하나님이 에서에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과 마주하신 하나님이 문제의 해결자이시고 복 자체이신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어쩌면 야곱은 브니엘에서 그날 밤 한번 하나님과 씨름한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하나님과 씨름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을 구하기보다 자기가 원하는 복을 얻겠다고 하나님과 겨루는 삶을, 자기 방식대로 버티는 삶, 고집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돌보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내가 원하는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붙잡아도 돌봐주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자기 죄로 인한 라반 아래에서의 도피 기간을 이스라엘 민족을 이룰 자녀들을 얻는 기간으로 사용하셨듯, 고난을 통해 그를 연단하셨듯 우리도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곱보다 좀 더 나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참된 복의 실체를 야곱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과 후손이라는 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릴 복된 땅, 영원한 안식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참 이스라엘인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 복인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큰 만족으로 여깁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웃게 하실 때나 울게 하실 때나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고, 나를 영원히 지키시는 분이심을 고백하며 삽시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 강해 (52) 창세기 35:1-29 (0) | 2023.04.30 |
---|---|
창세기 강해 (51) 창세기 33:18-34:31 (0) | 2023.04.23 |
창세기 강해 (49) 창세기 32:1-32 (0) | 2023.04.09 |
창세기 강해 (48) 창세기 31:1-55 (0) | 2023.04.02 |
창세기 강해 (47) 창세기 30:25-31:13 (0) | 2023.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