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3:16-44:34
야곱은 베냐민을 잃지 않으려고 고집했지만 결국 애굽 총리가 의도한대로 막내 베냐민을 형제들에게 맡겨 애굽으로 보냈습니다. 형제들이 베냐민과 함께 온 것을 안 요셉은 청지기를 시켜 자기 집에서 성대한 식사를 준비하게 합니다. 계속 누명을 쓰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요셉의 집에 가면서도 그 초대가 또 다른 음모가 아닐지 두려웠습니다. 형제들은 걱정하며 자기들을 인도하는 청지기에게 자루에 들어있던 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그대로 다 가져왔다고 형제들이 말하자 청지기는 안심하라면서 ‘그것은 너희들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것이고, 이미 우리는 너희 돈을 받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갇혀 있던 시므온을 풀어주어 만나게 했습니다.
총리에게 바칠 각종 예물들을 들고 식사 자리에 참여한 형제들 앞에 요셉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묻고, 베냐민을 보며 복을 빌어준 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다른 곳으로 자리를 피해 울다가 옵니다. 다시 돌아온 요셉은 다른 형제들보다 다섯 배나 많은 음식을 막내 베냐민에게 주며 특별히 여긴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요셉은 다시 청지기를 불러 형제들의 자루에 곡식을 가득 채우게 하고, 베냐민의 자루에는 자신의 은잔도 숨겨놓게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집을 향해 돌아가던 형제들에게 요셉의 청지기가 뒤따라왔고, 형제들의 짐을 뒤져 은잔을 찾아냈습니다. 결국 형제들은 다시 애굽으로 가야했습니다. 요셉 앞에서 선 형제들은 모두가 종이 되겠다고 했지만 요셉은 베냐민만 종이 되고, 나머지는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형제들 중 유다가 요셉 앞으로 나와 자신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오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버지 야곱에게 베냐민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했습니다. 베냐민이 돌아오지 못한 것을 아버지가 알면 슬픔 때문에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에 팔려오기 전 자기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일들을 베냐민을 통해 재현했습니다. 요셉이 식사 자리에서 베냐민에게 다섯 배의 음식을 더 준 것은 정말 다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베냐민이 특별한 존재임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은 요셉 자신이 채색옷을 비롯한 아버지의 차별적인 사랑을 받은 것을 베냐민에게 재현한 것입니다. 또 요셉과 형제들은 따로 차려진 상에서 떨어져 식사를 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는 애굽의 문화 때문이었지만 오래전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고 따로 떨어져 자신들의 배고픔을 해결한 장면이 재현된 것입니다. 전에는 요셉이 희생자로서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지배자의 위치에서 형들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고 식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또 요셉은 형들이 죄책감 없이 자기를 애굽으로 팔아버린 것처럼 베냐민을 애굽에 버려두고 갈 수 있는 상황을 재현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은잔을 베냐민이 훔친 것처럼 꾸며 사고를 친 베냐민을 다른 형제들이 보호하고 싶지 않게 했습니다. 물론 형제들은 베냐민에게서 은잔이 발견된 것도 음모임을 직감했고, 자신들이 잘못이 없고 억울하다고 요셉 앞에서 변호했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형제들은 더이상 곤란한 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해 베냐민을 버리고 가고 싶은 유혹이 생기도록 요셉이 시험한 것입니다. 요셉은 20여 년 전 형제들이 자신을 애굽에 팔아버리고, 아버지가 요셉을 죽은 것으로 여기게 한 것처럼 이번에도 베냐민을 애굽에 버려두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사한 상황이 반복된 시험 속에서 과거와 동일한 죄를 반복할 수 있었지만 다행이 형들은 요셉이 기대한 행동을 보여줬습니다. 그들은 베냐민을 버리지 않고 함께 하겠다고, 함께 노예가 되겠다고 애굽 총리에게 요청했습니다. 특별히 33절을 보면 요셉을 노예로 팔자고 제안했던 유다가 이제는 베냐민과 함께 총리의 노예가 되겠다고 자청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다는 베냐민이 아버지 야곱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애굽 총리에게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유다는 자기 아버지 야곱이 모든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편애를 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특히 20절을 보면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27절을 보면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라고 야곱이 한 말을 인용하면서 아버지 야곱이 라헬 외에 다른 여자들을 아내 취급하지 않고, 요셉과 베냐민 외에 다른 아들들은 자녀 취급하지 않은 것을 총리 앞에서 말합니다. 물론 유다는 아버지 야곱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총리가 붙잡으려는 베냐민이 야곱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알게 하고 놓아주기를 바란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의 그런 설명은 유다를 비롯한 다른 형제들이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게 하고, 그런 아버지가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낼 때까지도 달라진 것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런 야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아버지의 고통을 덜기 위해 막내 베냐민을 살리려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아버지 야곱보다 유다가 더 성숙한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아버지에게 상처받은 유다가 아버지가 받을 고통을 걱정했습니다.
형제들과 유다가 이렇게 변한 것은 정말 기적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과 베냐민만 아들로 인정했고 게다가 요셉은 눈치 없게 형들 앞에서 꿈 자랑을 하고 형들의 잘못을 일러바쳤기에 형제들은 요셉을 팔 때 죄책감을 별로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 미움과 증오의 상태가 본문에서까지 계속되었다면 형제들은 베냐민을 지킬 의지도 없었을 것이고, 베냐민을 잃고 고통스러워할 아버지에 대해 아무 걱정도 안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상처와 고통을 받은 것을 빌미로 가족에게 고통을 주던 형제들이 이제는 아버지 야곱과 그가 편애하는 베냐민을 위해 희생하는 태도로 변했습니다. 그런 희생적인 태도는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터득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생각지 못한 고통을 통해 반성하고, 훈련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가 베냐민 대신 노예가 되겠다고 한 것은 남이 당해야 할 죗값과 죽음을 대신 치르는 대속의 개념을 나타냅니다. 창세기에서 이삭 대신 번제물로 준비되었던 숫양이 이 대속 개념을 보여줍니다. 여기서는 유다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요셉 이야기에서 요셉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역할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유다도 함께 그 모형 역할에 참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12지파 중 바로 이 유다의 후손으로 오시는데, 유다는 예수님의 조상으로서 예수님이 죄인들의 대속자이심을 예고하는 일에 사용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난당하기를 자처하신 것, 희생하신 것을 유다가 모형으로서 보여줍니다.
유다가 고난 속에서 달라지고 자기를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사실은 요셉이 먼저 그 일을 겪었고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형들에 의해 애굽에 팔려와 고생하고, 애굽 총리가 되어 자기를 판 형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먼저 변화되었습니다. 나아가 그런 요셉보다 하나님께서 먼저 희생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에게 분노를 일으킨 죄인들을 향한 긍휼과 희생을 자기 아들을 통해 계획하셨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사역과 십자가에서 그런 희생을 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희생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분노를 일으키는 자들이 고통당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들이 부모이든지, 자녀이든지, 친구이든지, 직장 동료이든지 그들이 자기 어리석음과 습관을 버리지 않고 계속 주변에 문제를 일으키고 내게 고통을 안겨 줄지라도 안타깝게 여기게 하십니다. 그들이 당할 고통을 우리가 고소하게 여기기보다 안타깝게 여기는 심정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요셉의 형제들에게 고난을 주시고 마음을 낮추셨을 때 베냐민과 아버지를 배려하고 희생하려는 마음이 생긴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셔서 내 잘못을 보게 하시고, 나의 죄가 어떻게 용서되었는지 깨닫게 하시고, 용서할 마음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주십니다. 유다가 미워했던 아버지 야곱을 이제는 걱정하게 된 것처럼 그 마음을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괴롭게 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긍휼을 베풀게 하시고, 섬기도록 하십니다. 예수님 닮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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