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창세기 강해 (63) 창세기 45:1-28

따뜻한 진리 2023. 7. 16. 20:20

창세기 45:1-28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형 유다가 아버지 야곱과 동생 베냐민을 걱정하며 자기를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요셉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형제들 외에 다른 사람들을 물러가게 했습니다. 요셉은 큰 소리로 울며 형제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3절을 보면 형들이 놀라서 말을 못했다고 하는데, 여기 “놀라서”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전쟁터에서 곧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에 온몸이 굳어져 마비될 정도의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형제들은 자기가 요셉이라는 애굽 총리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 곡식을 구하러 온 이후 계속 음모에 시달렸기 때문에 자기가 요셉이라는 총리의 말도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형들이 팔았던 바로 그 사람이며, 형들이 자신을 팔았지만 자기는 앙갚음을 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셨고, 아직 흉년이 5년이나 남아있기 때문에 가족 모두 애굽으로 와서 살아야 한다고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안고 울었고, 다른 형제들도 안고 울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요셉의 형제들이 온 사실을 알고 함께 기뻐했고, 가족들이 모두 애굽으로 이주하는데 필요한 수레와 물건들과 오랫동안 거주할 좋은 땅도 허락해주었습니다. 과거 형들은 요셉의 채색옷을 벗겼었지만 이제 요셉은 형들에게 입고 갈 옷을 한 벌씩 선물했고,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양식과 애굽의 귀한 선물들도 함께 보냈습니다. 고향에 도착한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에 대해 말했지만 처음에는 믿지 못하다가 함께 온 수레와 선물들을 보고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다시 만날 수 있겠다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본문에서 요셉은 두려워하는 형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이 애굽까지 팔려오게 된 의미에 대해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5절을 보면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절에서는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절을 보면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17세에 형들에 의해 팔려 애굽에 와서 30세까지 겪은 고난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은 자기 인생에서 일어난 비참한 일은 하나님께서 가족과 후손들을 위해 자기를 먼저 애굽에 보내 준비시키신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요셉에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고통을 안겨준 자는 바로 그들의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이 모든 일의 주관자이시고, 오래전부터 계획하시고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일을 이루시려고 자신을 사용하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자기 인생을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고백한 내용들, 하나님이 고난을 겪게 하신 이유와 목적을 요셉이 언제부터 깨닫고 확신하고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꿈을 보여주셨을 때부터 자신이 겪을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있었을까요?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알았을까요? 감옥에 갇혔을 때였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에 곡식을 가지러 온 형들을 시험하면서 깨닫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동안 겪은 일과 애굽의 총리가 되어 흉년을 대비하게 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을 형들을 다시 마주하기 시작하면서 깨닫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죽을 뻔한 것과 상인들에게 팔려서 노예 생활을 하고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감옥에서 수년을 보내면서 고통을 겪는 그 순간에는 고통의 의미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때는 아버지 집에서 꾸었던 그 꿈의 의미를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요셉이 고생할 당시에는 그저 억울한 것이고, 자신의 재능과 젊은 날을 낭비하는 비참한 시간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우리도 고생할 때, 남들에 의해 괴로움을 겪게 될 때 그 순간에는 의미를 모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고통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게 분노와 원망을 품기도 합니다. 낙심합니다. 또 바라던 일이 이뤄지지 않고 오랜 시간 실패와 절망을 맛볼 때도 자신을 원망하거나 상황 탓을 하고, 또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런 일을 허락하신 분이심을 우리가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원대한 꿈을 주셨지만 오히려 어둠 속에 갇혀 있게 하신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자신을 버린 형제들에 대해 요셉은 미운 감정을 오랫동안 품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결코 의도할 수 없고 상상하지 못할 방법으로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의 총리 자리에 올려놓으시고, 요셉이 형제들을 다시 만나게 하셨을 때 요셉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남들의 꿈만 해석해오다가 자신의 어릴 적 하나님이 주신 꿈의 의미를 드디어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죄성과 편애로 깨진 가정, 그 상처와 질투와 원망으로 비뚤어진 형제들이 요셉에게 고통을 가했지만 그런 가정과 서로의 죄가 하나님께 사용된 것임을 요셉이 인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감정을 내려놓고 형제들을 용서하고 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수많은 후손들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일에 요셉이 순종한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서 요셉은 하나님이 형제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그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자신을 먼저 보내셨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또 우리가 생각지 못하는 선한 일을 위해 사람들의 잘못과 죄를 사용하십니다. 이 때문에 잘못이 없는 의로운 사람이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당한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가 사람이지만 그 위에서 그것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모든 죄를 없애시고,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이나 당분간은 사람들의 죄를 허용하셔서 비밀스런 일들을 이루시는 것에 대해 우리는 신뢰해야 합니다. 그런 일로 의로운 자들을 연단하시면서 겸손케 하시고, 악인들도 회개하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원통한 일을 당해도 복수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참된 용서는 자신의 너그러운 마음에 대한 자기만족, 용서해주는 상대에게 감사를 기대하는 것, 용서하는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칭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인정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신뢰하는 것에서 바른 용서의 태도가 나옵니다. 우리의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거저 용서해주신 변함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용서를 베푼 상대의 태도에 따라 마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런 하나님에 대한 겸손한 신뢰를 전제로 형제들을 용서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형제들을 용서하고 섬기는 것이 자신이 마땅히 할 일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들은 그런 요셉의 진심을 잘 모른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그들은 요셉의 용서를 잘 믿지 못했습니다. 요셉의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불안해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마지막 50장 15절을 보면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형제들은 요셉이 그동안 아버지 때문에 참고 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제 아버지가 안 계시니 그동안 참은 복수를 이제 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용서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요셉의 용서는 가식적이거나 일단 복수를 미뤄두고 가족에 대한 도리를 다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 참된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하나님의 종임을 알고 자신의 정체성과 임무가 형제들의 앞날을 위해 섬기는 것임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런 요셉은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죄인들이 죽인 자가 그들을 살릴 구원자가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죽이려 했지만 오히려 그가 구원자가 되어 나타난 것처럼 예수님은 자기 동족인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죽임당하셨지만 그들의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셨지만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악인들의 죄를 허용하시는 하나님,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은 우리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다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과 지혜 안에서 우리 인생과 고통이 다뤄지고 있음을 신뢰합시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신뢰합시다. 우리의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 베푸실 수 있음을 생각합시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섬기는 일에 복종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