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27-4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그것을 자기 힘으로 채우려고 할 때 죄의 올무가 더욱 강하게 조여듭니다. 인간은 그로 인한 죄책감과 고통을 경험하면서 뒤늦게 후회하다가 절대자에게 의지함으로 해결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종교들은 자기 죄 때문에 고통하는 자에게 다시 책임을 지웁니다. 그런 종교들은 특정한 시간, 장소, 형식으로 신을 높이거나 선을 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인간에게 결정적인 책임을 지우지 않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나 같은 가망 없는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내가 나의 죄인된 것, 나의 어두운 것을 정직히 드러내기 전에, 그분을 알아보기 전에 가까이 다가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비참해지고 부끄러운 삶을 종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름 생각했습니다. 조상들이 믿었던 대로 하나님이 인정하실만한 예배를 잘 드리면 뭔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받으실 분이 자기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기 전에 그분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여인은 자기 앞에 나타난 그분의 능력과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영적 무지를 사라지게 할 만큼 그분이 자신을 드러내주시고, 자기에게로 이끌어주시는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여자는 너무나 놀랍고 기뻐서 물동이를 놔두고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부끄러움 때문에 피했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제 발로 찾아가서 자기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 사이 음식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오면서 멀리서부터 예수님이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봤습니다. 제자들이 보기에도 유대인 남자인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그런 경계를 허무는 일들에 대해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그렇게 경계를 허물고 다가오신 예수님 때문에 제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구해온 음식을 예수님께 드시라고 내밀었는데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음식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예수님께 음식을 갖다드렸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자신의 양식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참된 배부름, 참된 의미를 얻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과 통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갈증과 배고픔은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 그분과의 관계에 충실한 것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가 거듭남을 오해한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이 주실 물을 마시는 물로 오해한 것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양식을 육적인 양식으로 오해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면 이 “양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를 영속하는 길, 진정한 삶의 의미를 얻는 일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여 만족을 얻는 것에 달려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추수 이미지를 사용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연속된 교훈을 주십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육적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영적 추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알고 있는 대로 논밭의 곡식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되지만 예수님께서 기대하고 계시는 추수가 눈앞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35절).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눈을 들어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의미는 첫째, 예수님을 만난 한 여인 때문에 그 동네의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장면을 가리키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에 만백성이 믿게 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추수 이미지를 통해 두 번째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르지만 함께 즐거워한다(36절)는 내용입니다. 이 교훈은 세례요한과 같은 앞선 하나님의 종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예비하면서 사역했던 것의 결실로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오랜 일하심이 성자 예수님의 영적추수를 가능케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으로서 행하시고,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수고하시지만 자신은 성부하나님의 일하심에 참여하시는 것이라고 겸손하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주권이 있음을 고백하심으로 영광을 돌리신 것입니다.
이어서 38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음식으로 배부르게 되는 것은 남들의 수고에 의해 만족을 얻는 일이듯 예수님의 영적 배부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영혼들이 믿게 되는 일로 인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런 음식을 구해온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영혼들로 만족을 누리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런 내용으로 대화를 하시는 중에 정말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추수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온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오게 된 동기는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만나셨던 그 여인의 고백 때문인데, 그녀는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것이 29절과 39절에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그녀는 자신의 치부를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을 피해서 늘 숨어 다녔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이미 다 알고 계신 분”이 오셨는데 피해서 자기 집으로 숨지 않고, 이전에 피해 다니던 동네 사람들에게까지 와서 그분을 소개하러 왔다는 것은 동네 사람들에게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께 모여들었고, 말씀을 나누시는 과정에서 예수님은 이틀을 머물게 되셨고, 믿은 사람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동네 사람들은 그 여자에게 “이제 우리가 믿게 된 것은 당신의 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듣고 예수님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본문 중 예수님의 추수교훈을 통해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영혼을 얻는 일, 전도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의 수고와 결실이 기계적으로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취를 맛보고 싶고, 자기가 수고한 것에 대한 인정과 보상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씨를 뿌리기만 하다가 가는 자들도 있습니다. 반대로 시늉만 했는데 쉽게 결실을 얻는 사람도 있습니다. 수고한 자와 결실을 얻는 자가 다르다는 원리는 씨뿌리는 자에 해당되는 자에게는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은 위기를 줍니다. 또 반대로 자기 노력의 결과가 아닌데 쉽게 결실을 얻는 자들에게는 착각에 빠질 위험요소가 됩니다. 자기가 전도한 사람들이 마치 자기 사람들인 것처럼, 자기 노력의 결실이고 하나님이 자신을 인정해주셔서 교회가 성장한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에 대해 우리는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허탈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25:24에서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라는 핑계를 대면서 주인의 원리에 대한 불만을 품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하고, 수고하는 자들입니다. 결실은 우리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고, 우리가 얼마나 결실했느냐가 우리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것에 참여하는 은혜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얻은 것, 또 얻게 될 영원한 것들이 우리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얻으신 것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동네 사람들이 한 고백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게 된 것은 당신의 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듣고 예수님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 알았기 때문”이라는 고백입니다. 또 우리가 복음 전하고, 섬긴 영혼들이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섬기는 사람들과 교회가 나의 가치와 영향력을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지를 드러내야 마땅합니다. 그런 일이 있어야 우리가 제대로 헌신한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을 통해 주님이 드러나시는 것을 우리 또한 기대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생명을 주시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 때, 우리는 눈물로 씨를 뿌려도 감사하고, 많은 영혼들을 맡기셔도 겸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족케 해드리는 것으로 우리도 만족을 얻는 것, 그것이 바로 씨 뿌린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하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처럼 그런 일로 우리 영혼이 흡족함, 배부름을 경험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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