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22-3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만나신 후에 유대 땅에 거하시면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도 그 근처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얼마 후에 헤롯의 핍박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고 참수를 당하게 되었는데 아직은 그 때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사역하던 시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간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마치 경쟁구도 속에 있는 것처럼 오해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문제 때문에 세례요한의 제자와 한 유대인이 논쟁을 하다가 세례요한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그분에게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가고 있습니다.” 세례요한보다 예수님께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는 세례요한이 주목받고 있었는데 이제 예수님이 주목받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행하시는 것이 하늘에서 주신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예수님과 경쟁할 만한 사람도 아니며 단지 예수님을 예비하기 위해 보냄 받은 자라고 말했습니다. 신부를 얻게 된 신랑의 친구가 기뻐하는 것처럼 자신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런 기쁨을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는 말로 세례요한은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정의했습니다.
세례요한의 그러한 고백이 마땅한 것임을 설명하려고 본문의 저자 요한은 31절에서 예수님의 탁월성을 말하는데 첫 번째는 예수님이 위로부터 기원하신 분,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로써 만물 위에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을 포함한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들은 땅에서 난 자이고, 땅에 속해서 땅의 것을 말하는 자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으로서 모든 피조물들 위에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근원이 다르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아들이시기 때문에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32절에서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라고 말하는데 예수님이 성부하나님을 직접 아시고, 함께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시고, 말하시는 것은 전해들은 것, 책이나 스승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라 성부하나님을 진실하게, 완전하게 알고 계시는 가운데 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 구원에 대해, 생명에 대해 완전하게 아시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에게 전하시는 가르침은 사람의 것과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자 요한은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요한이 처음부터 계속 반복하는 내용입니다. 빛이 어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1:5, 3:19), 자기 땅의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1:11)것으로 묘사된 일로써 예수님에 대해 무지하거나 예수님을 무시하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어떤 가르침과 증거보다 확실하고 , 진리 자체인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계시와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상이지만 반대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일들이 있는데, 그것은 단지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14장 9절을 보면 예수님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누구신지 알고 믿는 일은 성부하나님을 알고 믿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성부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시는 일이 절대적으로 옳은 일이고, 선한 일이고, 지혜로운 일이고, 필요한 것임을 인정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세 번째로 성부하나님 편에서 예수님을 보증하시는 일을 하시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34절에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임하셔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증하시는 한편, 믿게 될 자들에게도 임하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보증하시는 것은 그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이 세상 그 무엇, 누구보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나타내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예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35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생각나는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와 구조가 유사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대상과 주는 것이 서로 뒤바뀐 것입니다. 앞에서는 사랑하는 세상에게 자기 아들을 주셨다는 것인데, 오늘 본문에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세상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두 문장이 모순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자들(세상)을 사랑하시는 방법은 그저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기 아들의 다스림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에서 자유롭게 되고,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의 전부라면 인간은 희망이 없습니다. 또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구원은 우리를 진정 위하는 존재가 책임지고 우리를 다스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으로 세상의 일을 다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영원토록 다스릴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분이 세상의 주인, 나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36절은 "아들을 믿는 자"의 반대를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분이 주인 되시는 것에 대한 반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분이 주인이 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포도원 비유를 하시면서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종들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죄인인 것은 바로 주인이신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 자신이 주인이 되려는 것입니다. 자기 맘대로 하고 싶은 것이 죄인의 본성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경외한다는 종교적 모양새는 갖추지만 막상 하나님의 주권이 현실화되면, 그 주권이 자기의 삶에 개입하면, 자기 주도권을 내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자기 생존과 권력유지를 위해 종교를 유지하고 섬겼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런 자들은 영생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무르게 된다고 36절에서 말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자신의 주권을 고집하는 자들은 그분의 통치가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전능자이신 그리스도의 그늘 아래에 거하는 것을 기뻐합니까? 주님을 제대로 믿는 자는 그분의 주인 되심을 당연히 여기며 어서 속히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통치가 완성되기를 고대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존재가 세상의 관점에서는 점점 축소되고, 약해질지라도 오직 그리스도만 높아지신다면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세례요한의 고백이며,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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