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13-2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지난 시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듭난 자가 알게 되고 믿게 되는 “땅의 일”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 “땅의 일”은 예수님이 땅에 오신 것과 그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일입니다. 이 일은 오직 성령에 의해 거듭난 자만이 알 수 있고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오늘 본문 13절부터 15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자신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그 분이신 것과 하늘에 다시 올라가실 것이 그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일들은 십자가에 달리는 일 없이는 의미가 없음을 말씀하셨는데, 모세 시대에 광야에서 있었던 구리뱀 사건을 언급하심으로 자신이 그렇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광야 여정에서 백성들이 불평을 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어 물게 하셨고, 많은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불뱀모양을 장대에 달아 놓고 그것을 쳐다보는 자들은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구리로 불뱀 모양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았고, 불뱀에 물렸던 사람들이 구리뱀을 쳐다보자 살았습니다.
그 구리뱀이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해석들을 하는데, 단순히 ‘구리뱀(놋뱀)이 그리스도다’라고 설명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등장한 뱀은 죄의 상징이고, 사탄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 의미가 성경에서 지속됩니다. 죄, 사단의 상징으로서의 뱀의 의미는 불뱀 사건에서도 유효합니다. 백성들이 불뱀에 물린 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만들라고 하신 구리뱀은 다른 뱀이 아니라 사람들을 문 불뱀의 형상이기 때문에 그 장대에 달린 구리뱀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을 문 그 불뱀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들을 문 그 불뱀이 장대에 달린 것을 봤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죽을 자들이 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만든 것입니까? 장대에 달린 그 구리뱀은 자신들이 무엇을 섬기고 있었는지를 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현실에서 자신들을 보살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도 불평하고, 불신을 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면서도 그들이 섬겼던 것은 사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기보다 자신의 목숨과 권리를 우선하는 것은 사단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단은 그 욕망을 위해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것 같지만 결국 죽입니다. 멸망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래서 그 뱀에 물리게 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 뱀을 매달아 죽게 하셨고, 그것을 볼 때 자신들을 살리신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것을 보는 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불신했고, 사단을 섬겼음을 시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신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 그런 자신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일이 최종적으로 어디서 나타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런 자부심을 무너뜨리고, 성전에서 소란을 일으킨 예수가 신성을 모독한 자, 사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진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섬겼는지를, 하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무엇을 우선시 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죄인은 매달리신 그리스도를 보며 구원을 위한 죄의 자각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광야 백성들에게 구리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신 방법이었습니다.
장대에 달린 구리뱀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진실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인간이 누구인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십자가가 말해줍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미워하고 또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며 자기정당화를 하려고 하는지 그 극악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런 인간의 죄를 하나님이 어떻게 해결하시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징벌을 받아 마땅한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의 죄와 그것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죄를 결코 넘어가실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죄인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놀라운 사랑을 함께 보여주는 것입니다.
16절은 그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에서 “이처럼”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정도와 깊이를 뜻하는 ‘이만큼’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문맥상으로는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우선 말합니다.
어떻게 사랑하셨는지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14절부터 17절까지의 구조를 이해해야합니다. 14, 15절을 연결한 한 문장과 16절 그리고 17절 이 세 문장이 "그를 믿는 자마다(그로 말미암아) 영생(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후반부 서술로 반복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6절의 "이처럼 사랑하사"는 14절의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와 17절의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처럼"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방법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방법으로 "이처럼"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16, 17, 18절에서 반복해서 심판을 언급합니다. 요한이 “멸망”,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왜 합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누구나 구원받을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 구원받지 못하는, 심판 받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은 죄를 극복한 우리의 어떤 능력과 관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능력이 부족하여 심판에 처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체를 시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자 하는 믿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모두 이뤄주신 일,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판을 자초합니다.
구리뱀이 매달린 것처럼 죄인들의 손에 자기 아들을 매달아 죽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이 땅, 이 현실에서 일어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으로 죄를 다루고, 추상적으로 사랑을 논하시지 않고, 인간들이 자기 죄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할 수 없도록 고통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은 이 땅에 거하는 우리의 현실과 실상을 위한, 진정한 “땅의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인데, 이 “심판”은 나뉘어 분리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지 않는 자들은 최후 심판 이전에 구원 받지 못할 자로서 자신을 분리시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킨 것입니다. 스스로 정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어떻게 더욱 스스로 확고하게 합니까? 19절을 보면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이는 요한복음 1장에서 진술되고 있는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둔 상태의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다시 말하는 것입니다. 어둠을 사랑하는 것이 왜 정죄입니까? 자신의 심판을 더 확고하게 합니까?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세상을 핑계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문제시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자이신 것을 부정하고 자신이 판단자가 되려는 삶을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핑계, 자기보다 더 악한 자들이 많다는 핑계,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든다는 핑계를 합니다. 그렇게 합리화하면 세상이 달콤한 것들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런 믿지 않는 자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어둠은 바로 세상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인간들은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어 서로 숨겨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지 않고 자신들의 죄를 합리화할 재료를 서로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빛을 비추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더욱 숨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이미 심판에 처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자,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고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는 그 빛을 사랑합니다. 그 빛이 자신을 비출 때 실상이 드러나는 수치와 이전에 나의 생존을 가능케 했던 것들을 버리는 상실과 고통이 있지만 그것이 살 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어둔 세상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등질 것인데,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것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피할 수도 없고, 모든 것을 용서하신 하나님을 피할 필요도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 아시고 다 용서하신 하나님 안에 내가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합니다. 빛 되신 주께로 가까이 갑니다. 자신의 무결함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판단 받는 것이 자기 살 길임을 알기 때문,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되는 것이 복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하려는 죄인을 사로잡으시는 주님 (요 4:1-26) (0) | 2015.03.08 |
---|---|
아들이신 그분이 높아지시기를 (요 3:22-36) (0) | 2015.03.01 |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되는 거듭남 (요 2:23-3:12) (0) | 2015.02.15 |
인간을 위한 종교가 모독당하다 (요 2:13-22) (0) | 2015.02.08 |
변할 수 없는 것을 변화시키는 주님 (요 2:1-12) (0) | 2015.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