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1-8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엿새 전 베다니에 계셨습니다. 베다니는 나사로의 가족들이 사는 곳인데 거기서 잔치가 열렸습니다. 아마도 마르다의 가족들이 나사로가 살아난 것에 대한 기쁨과 살려주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 준비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르다는 다른 본문에서도 나타나듯 잔치일을 하고 있었고, 마리아는 예수님께 와서 향유를 그 발에 부었습니다.
마리아가 부은 나드 향유는 아주 비싼 것이었습니다. 당시 노동자의 품삯 일년치 정도나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정에 밝고 계산이 빠른 가룟 유다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마리아가 한 일에 대해 황당하다는 듯 문제를 제기 했습니다. ‘그 향유를 팔면 삼백 데니라온 정도가 되니 차라리 그것으로 가난한 자들을 돕는데 쓰면 훨씬 가치 있는데, 어찌 부어서 버리느냐.’고 그는 말했습니다.
유다의 지적은 한편 맞는 말입니다. 당시에는 굶주림이 일상적인 것이었고, 가난한 자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에 대한 나눔과 긍휼을 중요시 하셨습니다. 또 8절에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라히라”라는 말씀에서 제자들, 예수를 믿는 자들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러나 6절에서 요한이 밝히는 대로 유다는 정말 가난한 자들이 눈에 밟혀서 마리아의 일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돈궤를 맡은 자이기 때문에, 큰 돈을 횡령할 좋은 기회가 버려지는 것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것을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했지만 가룟 유다는 주님께 드려지는 것조차 자기가 취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그런 말에 마리아의 행동이 헛된 일이 아니라고, 그 일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장례를 위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전부터 자신의 죽음을 계속 예고하셨고, 또 공회에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위협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잡히시고 죽임 당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으로 그런 것들을 무력화시키고 뜻을 펼치셔야 한다는 기대도 여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실 때까지도 예수님을 자신들의 힘으로 지키려 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님께서 자발적으로 이루시는 일이라고, 확실하게 예정된 일이라고 말씀하셨어도 그들은 정확하게, 반드시 일어날 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그런 말씀과 행동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아차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정확하게 예견하고 그 일에 맞게 자신의 행동을 준비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예수님의 외면을 통해 그동안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 것들이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인간이셨기에 자신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기다리셨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보통 사람처럼 고통을 동일하게 겪으시는 육신인 동시에 자기가 당할 일을 정확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로 묵묵히 가셨지만 그 두려움은 보통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것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곧 닥칠 죽음을 느껴도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막막한 두려움이지만 그분은 그 죽음의 고통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음에 대해 어떤 사람보다 두려우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잡히시기 전날 처절하게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일주일을 앞둔 시점에서 그런 슬픔과 심적 부담이 겉으로 드러났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마리아가 그것을 느끼게 하셨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종이 주인의 발을 씻기는 것처럼,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그냥 향유를 쏟아 부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향유를 아꼈을 것입니다. 조금만 써도 엄청난 향이 나는 향유를 다 쏟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런 현실적인 사고가 개입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냥 쏟은 것입니다. 기회가 지나가면 남겨둔들 소용이 없기 때문에 위기를 직감한 순간에 퍼부은 것입니다.
7절에서 예수님은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 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향유를 남겨두게 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연관된 것으로서 마리아가 한 행동은 예정된 것이니 의미를 훼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 다른 말로 마무리 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라고 마리아가 자신을 위해 향유를 허비한 의미가 보존되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종합하면 그것은 마리아의 행동이 예수님의 죽음에 관해 의미를 전달해 주고 있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계속해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에 앞서 향유를 허비한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첫째, 그것은 인간 편에서 주님께 드려지는 어떤 헌신도 낭비일 수 없음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너무 귀한 것이라 하나님께 드리지 못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이미 하나님께서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을 위해 이해할 수 없는 큰 희생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것을 죄인들을 위해 부으셨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고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과용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런 과분한 사랑이 우리의 가치를 말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의미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고귀한 사랑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께 구원받은 우리가 아까워서 드릴지 못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에게 있는 어떤 귀한 것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우리가 아무리 값진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 해도 자신만만하게, 떳떳하게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받아주시는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두 번째, 우리의 우선적인 헌신의 대상은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책임을 갖고 마리아를 윽박질렀습니다. 이웃의 고통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무시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복음, 믿음, 주님의 주인 되심, 바른 교리 이런 것들은 허황된 것들이고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 속에서 이웃들과 같아지고, 그들을 살리는 것이 핵심이라고 여기는 그룹들도 있습니다. 이웃 사랑이 복음이고, 구원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예수님의 모범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런 헌신적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감동을 자아냅니다. 기독교의 발전에 공헌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삶, 실천, 사람들의 현실적 필요를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그렇고, 배고프고 아픈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선행이 아무리 뛰어나도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근거로 자기 신앙을 점검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의 선행과 성취로 믿음을 보완하려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영혼의 만족인 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 도와준 보람이 삶의 활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아상을 개선시키고, 구원받기에 합당한 ‘괜찮은 나’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만족하는 것보다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한 자신의 모습에서 위안과 만족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나 큰 것임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복음을 날마다 기뻐하는 일이 계속 될 때 이웃 사랑이 자기 의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헌신 아래에서 보이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흘러 나와야 합니다. 그럴 때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일주일 남은 예수님의 죽음은 곧 닥칠 현실이었지만 예수님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남의 이야기였습니다. 제자들은 들어 왔지만 믿지 않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만 그 고귀한 죽음을 직감했고, 슬퍼했고, 위로했고,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관련해서 닥칠 현실, 그 마지막을 알 때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더욱 고대하며 자신을 성결하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에게 그 일이 닥치기 전 그 영혼을 사랑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표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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