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45-5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그런 일에 큰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그동안 예수가 귀신 들린 자이고,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고 있다는 여론을 조성하려 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의결기구인 공회가 소집되었습니다. 당시 유럽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 있었고, 로마는 점령지의 자치권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었습니다. 공회에 모인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로마의 눈치를 보면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거기 모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그냥 놔두면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게 되고 예수가 새로운 지도자로 등극하거나 민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로마정권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도층이 아닌 다른 세력이 나타난 것을 위협요소로 인식하고 무력으로 유대 땅을 진압할 것이라고 그들은 서로 이야기 했습니다. 48절을 보면 그들은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하고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잃고, 성전도 잃고, 주권도 잃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집스런 죄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형식적인 종교로 만족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그런 백성들 속에서 나온 지도자들은 당연히 공의롭지 못한 부패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죄 때문에 앗수르, 바벨론 같은 열강들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지만 고통의 시간이 끝나고 예루살렘이 재건된 후 그들은 여전했습니다.
예수를 죽이려는 지도자들은 마치 자신들의 나라와 백성을 깊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누려온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으로서의 나라를 다시 잃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권력에 의해 착취당해줄 백성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 로마와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하는데 그들은 예수가 그런 것들을 방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했을까요? 그들 사이에서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아일수도 있다는 주장은 제기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를 스스로 지키려 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빠진 것입니다. 자신들이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진 것이 많을수록 두려운 것은 이미 가진 것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에게 예수는 자신이 가진 그것을 빼앗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땅과 백성들을 빼앗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의 나라는 그들의 땅을 초월하며 주님의 백성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히브리 민족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의 성전은 이 땅의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실 온전한 예배를 가능케 하는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땅과 백성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 빠졌을 때에 대제사장 중 하나인 가야바가 이런 말했습니다. ‘온 민족이 망하는 것보다 예수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당신들한테 유익하지 않느냐.’ 다들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럴듯한 명분을 제시하지 못하며 두려움만 내비치는 공회원들에게 가야바는 대의명분을 냉소적으로 제시하며 일이 진행되게 한 것입니다.
그 말에 대해 저자 요한은 마치 가야바가 자기도 모르게 예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야바는 다른 공회원들에게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는구만’하면서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지혜인 것처럼, 자신이 총대를 메는 용기를 발휘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 자신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의 죽음이 백성을 위한 죽음인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것은 자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대신 죽으신 것인데, 인간들은 예수를 죽여서 사회적 안정을 되찾는 일이 자신들의 지혜라고 여긴 것입니다.
가야바의 그 말에 공회원들은 예수를 죽일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 피하셨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세인들은 누구든지 예수가 있는 곳을 알면 신고하라고 공개수배 했습니다.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지방에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큰 명절이니 예수가 예루살렘이 반드시 오지 않겠냐며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지내는데 있어서 중요한 일, 즉 자신들이 잡을 양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죄를 진정 깨끗하게 할 하나님의 어린양이 이제 자신들의 손에 죽게 된다는 것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의 죽음을 근본적으로 다루실 수 있음을 보게 했고, 그런 일을 하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믿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죽이겠다고 기회를 살피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더 이상 참고 기다릴 수 없는, 이제는 자신들이 마음에 품었던 것을 실행해야 할 때가 됐음을 알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일로 자신의 죽는 일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죽는 것이 진정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고, 이 백성들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죽여야 예루살렘과 백성과 성전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신지 약 30년 후 로마 장관 디도가 8만의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게 해서 지키려 했던 것이 지켜졌습니까?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했던 로마제국도 지금은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지키려는 것은 언젠가는 잃거나 사라집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또 그들은 예수를 죽이는 것이 상대적으로 적은 희생을 치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수의 선량한 백성을 위해 문제를 일으키는 한 명을 죽이는 선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흉악한 범죄자였다면, 그리고 우리와 같은 보통 인간이었다면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의 가치는 그들의 이해와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은 전 인류의 생명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극악무도한 테러범 백 명이 아이 한 명을 인질로 잡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그 테러범들 전부가 죽더라도 아이 한 명을 구해 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멸망당하는 것이 마땅한 수많은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아들이 희생을 당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희생입니다. 100원짜리를 찾기 위해 수천억 원의 돈을 낭비하는 것 이상의 허비입니다. 영원토록 죄로 인한 저주 가운데 살게 해도 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극한 고통을 감당하시면서 살려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런 사랑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죽이려는 자들은 몰랐습니다. 그냥 죽어 마땅한 범죄자를 없애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들의 판단은 빗나갔습니다. 자신들의 지혜인 줄 알았지만 무지였습니다. 그런 무지는 하나님의 지혜를 부각시키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사용되기는 했습니다. 그런 자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르고 선한 것을 예수님이 방해한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그토록 원하는 좋은 것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인간이 원하는 죽지 않고 살 길, 다함이 없는 기쁨, 사라지지 않는 평안, 영원히 빼앗기지 않는 안전한 나라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믿지 못하면 그저 예수님의 복음을 거절하고 억압, 핍박합니다. 어느 시대에나 그랬고,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독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삶의 방해자라고 생각하면서 없애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크고 영원한 복을 발로 차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만 주실 수 있습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 같지 않았던 진짜 왕 (요 12:9-19) (0) | 2015.07.26 |
---|---|
아낌없이 부어진 사랑 (요 12:1-8) (0) | 2015.07.19 |
예수님을 믿게 하는 부활 (요 11:17-44) (0) | 2015.07.05 |
죽음을 막지 않으신 의도 (요 11:1-16) (0) | 2015.06.28 |
양과 이리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요 10:19-42) (0) | 2015.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