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왕 같지 않았던 진짜 왕 (요 12:9-19)

따뜻한 진리 2015. 7. 26. 23:34

요한복음 12:9-19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 유월절 순례객들 사이에서 크게 소문이 돌아 큰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난 나사로까지 죽이려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순례자들은 예수님이 그곳에 오신다는 소식에 모두들 흥분했습니다. 요세푸스라는 역사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30년 쯤 후 에는 유월절 순례자들이 약 250만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그보다 적었겠지만 그래도 상당한 수가 예루살렘에 모였을 것입니다. 그들 중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마침 모여든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준비해서 그 길목에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월드컵 개최를 했을 때 우리 팀의 경기를 앞둔 서울 시청 앞의 분위기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군중은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시편 118편에서 인용한 것으로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는 것은 꽃다발이나 부채를 흔드는 것처럼 우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강력한 요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치에서 전당대회를 할 때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힘을 싣기 위한 지지자들의 액션과 같습니다. 혹은 운동 경기에서 자기편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이만큼 승리를 원하고, 지지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종려나무는 유대국가의 상징이고, 그것을 흔드는 것은 다른 세력들을 대항해서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강력하게 염원하는 민중의 행동이었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는 이 군중을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 때도 만나셨습니다. 그때는 예수님께서 피하셨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거절하시고,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나귀는 말보다 작은데 예수님이 타신 것은 어린 나귀였으니 더 작아서 멋진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세력을 얻고 지지를 받는 인물답게 멋진 말을 타고 지나가야 하는데, 나귀를 타고 지나가신 모습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 어쩌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군중의 기대와 어울리지 않게 지나가심으로서 그들의 정치적 환영에 대한 의도적인 반대를 하신 것입니다. 또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민중의 세력을 이용할 위험인물로 본 것이 얼마나 잘못된 판단인지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것도, 그들을 이용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예수님의 그런 행차가 이해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제자들이 그 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가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이해했고, 성경에서 예고한 것임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 예언은 스가랴 99절에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나귀 새끼니라라는 말씀입니다. 군중과 제자들은 처음에 그것이 겸손의 표현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세상의 왕이 사람들의 칭송을 받지 않으시고, 거절하시면서 가신 이유는 십자가 때문입니다. 그 군중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든 모르든, 믿든 안 믿든, 구원을 받든 못 받든 예수님은 그들의 칭송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위풍당당하게 그들의 앞을 지나가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이해가 없는 표현과 찬양에 의미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환영과 찬양을 받으시기보다 오히려 깨달으라고 의미를 가르치셨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그들이 원하는 이스라엘이라는 자기 나라의 승리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와 반역에 대해 승리하는 것임을 암시하셨습니다. 그 승리의 비결은 힘이나 능력으로 죄인인 우리를 짓밟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피조물에 의해 희생당하는 지극한 겸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으로 사랑을 증명하시며 승리하신 것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셔서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왕이시지만 힘으로 승리를 얻으시는 분이 아니라 약함으로 십자가에 달리셔서 승리를 얻으신 왕입니다. 또 예수님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가장 낮은 위치에서 섬기는 왕입니다. 십자가가 그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왕이 죄인들을 위해 가장 낮고 비참하게 죽는 일로 섬기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승리 방법이었고, 왕으로 인정받는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일을 자신의 일로 믿고 받아들일 때 예수님이 진정한 찬송과 존경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세상 왕이 외부의 적들을 이겨서 백성에게 승리를 주는 것과 같은 일만 하시지 않고 반역자인 우리도 이기셔서 자기 백성 삼으십니다. 즉 사단을 이겨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것뿐 아니라 우리에 대해서도 승리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죽이시고 다시 살리십니다. 십자가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사단뿐만 아니라 우리에 대하여 싸움을 하시고, 승리를 얻으신다는 사실에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이기시는 방법은 우리와 함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끊으시고, 저주를 끊으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전쟁에 능한 전사로서 우리를 이기실 때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기시는 방법은 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5절을 보면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역자인 우리를 끝장내러 오시는데 그것은 무서운 모습이 아니라 새롭게 하기 위한, 평화로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다윗의 자손이시지만 다윗처럼 말을 타고 전쟁을 수행하며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의 부흥을 이뤄줄 왕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짐을 싣거나 아이들이나 올라타는, 전쟁과는 무관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모습이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일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얻게 될 진정한 승리는 무엇인지, 어떻게 그분을 왕으로 모실 수 있는지를 말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