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십자가에 달리는 것으로 답하심 (요 12:20-50)

따뜻한 진리 2015. 8. 2. 23:09

요한복음 12:20-50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를 지나신 후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제자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들은 헬라인, 즉 그리스인들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유대교로 개종한 외국인들이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여러 지역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시기에 그들의 유일신 신앙을 보고 개종한 외국인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들의 종교에 비해 고상한 도덕적 수준을 담고 있는 유대교에 매력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들이 유월절에 참여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뵙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들은 헬라인들의 면담 요청에 대해 대답하셨습니다. 그 대답은 그들을 만나겠다, 안 만나겠다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 관한 설명으로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는 것이 자신의 영광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순종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구원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생명을 가진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비유로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 필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5절을 보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히라라.”라는 말씀으로 죽음이 생명을 가져오는 그 원리는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원리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려놓아 죽는 자가 진짜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들도 그와 유사한 죽음을 택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위대한 장수가 전쟁에서 나라를 위해, 대장부로서의 용맹을 드러내기 위해 눈 하나 깜빡 안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 또는 자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일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택하는 죽음을 결정하는 일들이 있는데 그것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죽음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시하는 죽음이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그런 이유로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없고, 또 그렇게 죽는 사람을 알아주거나 감동을 하거나 고마워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저에게 고마운 일이고 감동을 주는데요!’ 그것은 예수님의 날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이 철저히 나 중심적인 본성에 따라 고마운 것이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순종하기 위해 죽었다는 사실 자체는 감동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죽음의 고통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너무나 두려우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완전히 드러나는 진노를 다 받아서 그분의 영광을 높이는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 아셨습니다. 그래서 27절에 지금 내 마음이 두려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청하셨습니다. 정직하게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순종의 의지를 보이셨습니다.

 

    왜 그런 내면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셨습니까?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그 때와 방법에 대해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을 제자들이 나중에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 그 죽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예수님의 자발적인 일이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목적에 따라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예수님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라고 다시 한 번 의도를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자신의 죽음이 세상의 임금 사단을 쫓아내기 위한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죽음을 통해 자기 백성을 자기에게로 이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 있었던 자들은 율법에서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계신다고 했는데, 왜 당신은 인자가 들려서 죽어야 한다고 말하느냐고 반문을 했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이 믿지 않는 이유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그것은 이미 예견된 것이라고 이사야서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설명했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의 그런 불신의 문제를 처음부터 다루어 오다가 드디어 본문에서 그 숨겨진 신비를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영광스럽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런 불신과 무지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헬라인들의 면담 요청에 대한 대답인 동시에 유대인들의 계속된 질문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었습니다. 오직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답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2-23절을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시각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떻게 이해될 것인가의 문제는 사도 바울이 말하기 전에 본문에서 예수님이 먼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증거를 추구하는 유대인들과 윤리, 철학, 지혜처럼 고상한 가치를 추구하는 헬라인들 모두에게 십자가가 답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종교적 영광을 구하는 유대인에게는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고 무식한 사형방법입니다. 또 신이 인간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일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 자신에게 전혀 영광스럽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는 길이 자신의 살 길이었고, 우리가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할지라도, 구원을 위한 어떤 진지한 물음을 하고 길을 찾을지라도 인간에게서 시작된 어떤 것도 답이 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구원의 문제조차도 자기 목숨을 위해 간구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가 구원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십자가가 자기 영광을 위해 인간이 쌓아온 가치와 통념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죄인의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사탄과 우리의 죄에 의해 가려진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는 것은 우리의 구원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현실의 생존 문제로 교회를 찾을 수 있고, 헬라인들처럼 삶의 의미를 얻고 사고와 감정의 고양을 위해 예수를 믿을 수도 있지만 구원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를 간과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봐야 하며, 그 고난이 사실은 내가 당할 것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완전한 은혜로 허락된 구원에 안심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영광,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도 십자가를 통해 그런 것들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구원을 얻은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입니다. 인간의 눈에 가장 영광스럽지 못한 일을 통해 영광을 얻으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십자가에서 나타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