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1-20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생애 마지막에 제자들의 믿음을 챙기신 일은 앞에서도 계속되었고, 십자가상에서 그리고 부활한 후까지도 계속됩니다.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은 믿음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고, 그것은 구원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큰 최종 목적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심으로 영광을 얻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표현은 구원하시는 일을 통해 표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 구원을 위해 믿음을 갖게 하시려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믿음의 내용을 친밀하고 실제적인 경험 속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씻기셨습니다. 발을 씻기는 일은 종의 일이었고, 종이 하는 일 중에서도 천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발을 씻기신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의미에서 메시아인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서열에나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믿을 수 없는,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의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종이 되셔서 자신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그런 인간의 놀이판을 뒤집는 일이었습니다. 만약 대기업의 회장님이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서 걸레질을 한다면 그 아래의 모든 직급들이 안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가장 싫어하겠습니까? 회장과 가까운 직급일수록 싫어합니다. 그런 일을 인간은 싫어합니다. 위에서 권위와 질서를 잡아줘야 아래에서도 권력 놀음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그렇게 인간들의 관계를 장악하고 있는 위계질서, 서열, 존경에 관한 통념을 전복시키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발을 씻기실 차례가 되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기 발을 씻으실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와 네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이번에는 머리와 손도 씻겨 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정말 예수님께서 자신의 온 몸을 씻겨주시길 바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지나친 것을 요구함으로써 예수님의 행동을 막아보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이미 목욕을 했으니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시고 자신이 방금 하신 일의 의미를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는 제자들도 서로 발을 씻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14절에서 “내가 주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절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내가 한대로 너희들도 서로 해라.’의 내용을 반복 설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아주 분명합니다. 서로의 죄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상대의 더러운 죄를 종이 발을 씻기듯 용서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살아서 돌아다닌다면 계속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발을 계속해서 서로 씻겨주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선생 또는 주이신 예수님이 몸소 자신들에게 하셨기 때문에 피할 수가 없습니다. 더럽다고, 상대가 싫다고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나의 발을 씻기셨기 때문에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서로의 발을 씻기는 것을 거절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없음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신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용서로 인해 어떤 감격도 변화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세족식은 매우 고상한 일이 되었습니다. 하나의 의식이 되어서 진지한 감동을 주는 행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나 학교, 또는 직장에서 용서, 섬김의 이미지를 만드는 순서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종이 되어 세족하는 일’이 그런 식으로 사용될 때 예수님의 본래 의도가 왜곡되는 것입니다. 세족은 일상 속에서 상대의 더러운 것을 감당할 수준으로 자신을 낮추라는 것입니다. 상대의 더러운 죄, 계속 반복되는 죄, 다루기에 고역스런 죄를 겸손하게 처리하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의 죄 앞에서 나 자신을 높이고 자존심을 세울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셔서 나의 죄를 이미 씻으셨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대의 죄를 자기를 죽임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실천되지 않으면 ‘세족식’의 고상함은 그저 발 씻김을 받는 사람을 더욱 위축시킵니다. 높으신 분, 존경스런 분이 나의 발을 씻겼기 때문에 더 존경해야 되고, 그분에게 더 함부로 하지 못하게 되는 마음의 부담만 지우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라고 발을 씻기신 것이 아닙니다.
종에게 있어서 더러운 발을 씻기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고마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러운 발은 당연히 씻어야 하는데, 서로가 종이 되어 그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의식으로, 행사로 만들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발 씻어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의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주인의 발을 씻기지 않을 권리가 종에게 없는 것처럼 상대의 죄를 용서하지 못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을 끊임없이 하면서 무엇이 마음에서 일어나게 됩니까? 상대의 발을 씻기는 것이 내 기분대로 하는 일이 아니라 종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랑스러울 때나 미울 때나 내가 발을 씻기려면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용서의 원천이 예수님께 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이 자신들의 발을 씻기신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보다 가장 먼저 낮아지셔서 나를 섬기신 것, 예수님이 누구보다 가장 비천하게 낮아지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 종이 되셨으니 나도 종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용서하셨으니 이제 남은 일은 우리가 서로의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의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기기 위해 하나님의 종으로서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씻김을 받은 자는 다른 사람을 씻기게 됩니다. 우리 자신에게 누군가가 씻겨줘야 하는 더러움이 있음을 알기에 상대도 씻겨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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