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판사를 심문한 흉악범들 (요18:12-40)

따뜻한 진리 2015. 10. 18. 23:51

요한복음 18:12-40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은 밤에 잡히자마자 다음 날 새벽까지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왜 그렇게 급하게 처리했냐면, 유다의 배반에 의해 갑작스럽게 예수님을 체포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체포한 때가 목요일 밤이었고, 바로 다음 날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이 되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사형을 마치고 예수님을 죽은 상태로 십자가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안나스에게 먼저 끌려가셨습니다. 그런데 13절에 보면 당시의 대제사장은 안나스가 아니고 가야바입니다. 원래 안나스가 대제사장이었지만 로마 정권에 의해 그가 폐위되고 그의 사위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실권을 장인 안나스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나스에게 먼저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이 거짓된 것들을 은밀하게 가르쳤다고 책임을 추궁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가르쳤다고 두려움 없이 반론하셨습니다. 그 때 안나스의 아랫사람 중 하나가 예수님의 얼굴을 쳤고 예수님은 자신의 잘못이 있다면 증거를 대고 증인을 통해 합법적으로 유죄를 밝히라고 요구하십니다. 안나스는 그럴 자신이 없자 예수님을 사위 가야바에게 보냈고 거기서 다시 예수님은 공회로 보내지셨는데 이 부분은 요한이 기록하지 않고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서신 것을 28절부터 기록했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의 관사로 끌고 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빌라도의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자신들이 부정해지므로 유월절을 앞두고 자신들을 정결하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유월절 양을 먹으려는 종교적 열심을 가졌지만 진정한 어린양이신 예수님, 내 살을 먹으라는 주님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예수님을 죽게 해서 진정한 유월절의 의미를 성취하는 일을 부지불식간에 도왔을 뿐입니다.

 

    그들이 관사로 들어가지 않으니 빌라도가 밖으로 나왔고, 그들에게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냐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29절에서 그들은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대답했는데, 이것은 준비되지 성의 없는 대답이었고, 합법적으로 유죄를 밝힐 의지가 없는 자세였고, 실권자에 대한 무례한 대답입니다. 그들은 그저 그동안 얘기 했던 바이니 절차도 필요 없고, 빨리 선고만 내려달라는 압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다시 관사로 들어가 예수님을 불러서 나름대로 합법적인 결정을 하려고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습니다. 36, 37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지만 자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 나라에 힘으로 맞서지 않으며, 만약 그런 식으로 예수님이 왕이 되려 한다면 벌써 자기 세력으로 자신이 붙잡히지 않게 했을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 세상의 나라들과 대립되지만 그것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대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시적인 힘으로 예수님이 왕권을 얻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왕들처럼 자기 왕권을 억지로 인정받으시는 분도 아닙니다. 오직 영적으로 거듭나 회심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 자들에 의해 예수님은 왕으로 인정받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나라를 드러내는 실체이시고, 그 백성들이 모이는 기준점이 되시고, 백성들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십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지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떤 의미에서 왕이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증언하시는 진리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38절을 보면 그는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예수 당신이 진리가 뭔 줄 알고 하는 얘기냐하는 냉소입니다. 빌라도는 로마에서 파견된 자로서 공정하고 명분 있는 일처리를 하며 로마의 통치력을 가시화하는 동시에 유대 권력자들의 요구에도 부응하면서 원만하게 지내야 분란 없이 직책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빌라도에게 있어서 진리는 인간들의 힘의 대결 속에서 살아남는 비결입니다. 현실의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에게 있어서 진리는 좋게 넘어가는 것이고, 자신이 살아남는 길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님을 죽게 할 수는 없고, 유대 군중은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나름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누가 봐도 흉악한 범죄자인 바라바와 예수님 중 누구에게 사면의 기회를 줄 것인지 유대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풀어줄 수밖에 없도록 나름 지혜를 발휘한 것이지만 군중은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요구했습니다.

 

    대제사장이나,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했던 일에 정직하게 임했더라면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되며 구원의 기회를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지적받은 대로 자기 권위와 생존을 위해 붙잡고 있는 헛된 종교를 다 내려놓고, 자신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무시한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인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어떻게 할지 이미 결론을 다 내렸었고 그럴듯한 명분상의 절차로써 심문을 했을 뿐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드디어 골치 아픈 예수를 없애고 자신들이 살아왔던 이전의 삶을 지속할 것에 대한 기대만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심문하고 죽이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그들이 예수님의 죄를 정당하게 판단하려는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든 죽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바른 판단, 이성은 무시해야 할 마비된 것이었습니다. 둘째, 개인과 사회에 고통과 불안을 끼치는 바라바를 사형시키는 것이 마땅한 것인데도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이길 원했다는 것은 진정 선과 악의 기준도 제멋대로라는 것입니다. 바라바를 살려주기로 선택했다는 것은 바라바와 같은 죄인이 자신들과 함께 하는 것이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보다 낫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악을 사랑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또 결집된 목소리로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를 못 박으라고 빌라도에게 외쳤다는 것은 분명 지도자들이 선동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님이 거짓으로 백성들을 선동한다고 했지만 정작 거짓되게 백성을 선동한 것은 그 자신들이었습니다. 죽임 당해야 하는 범죄자들이 재판관을 죽이려한 것입니다. 그러니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주장과 광기에 사로잡혀 기괴한 선택들이 연속되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이성과 선과 사랑과 순수와 고결을 최고의 덕으로 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미화하고 찬양하고 싶은 안락함이 유지될 때의 환상입니다. 인간은 자기 권리를 침해당할 때 전혀 이성적이지 않으며, 정직하지 않으며, 친절하지 않습니다. 범죄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알게 됩니다. 전쟁이 일어날 때 어떤 만행들이 일어나는지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와 반대로 살만할수록 정치와 종교가 타락한다는 것은 재밌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고상한 가치를 가장 드높이는 그것들이 인간의 가능성이 마음껏 발휘되는 평화로운 때에 가장 타락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어떻게든 죽이려 했던, 죽게 놔둔 인간의 본성은 예수님 때만 작용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지도자들이 특별히 악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시대에 오셔도 교회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죽이려 할 것입니다.

 

    어떻게든 예수를 죽이려 했던 지도자들과 예수님이 드러내신 진리를 비웃은 빌라도를 통해 드러난 것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심문 당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진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 관한 진리와 하나님에 관한 진리였습니다. 칼빈이 말한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은 함께 역사하는데, 예수께서 십자가로 가는 과정에서 그것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실상이 드러나게 하셨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인간은 죄인이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무서운 존재라는 것과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끝까지 겸손하게 상대하신다는 것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실상을 알아야 하나님이 옳으신 것, 하나님의 일하심이 타당한 것임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을 알게 되어 눈이 떠져야 나와 세상의 실상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수록 죄인인 자신에 대해 정직하게 되길 바랍니다. 또 우리가 인생 살수록, 세상 알수록 더욱 하나님 편에 서게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