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진짜 신성모독자들이 밝혀짐 (요 19:1-16)

따뜻한 진리 2015. 10. 25. 22:53

요한복음 19:1-1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빌라도는 죄 없는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의도했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겠다고 하자 예상이 빗나간 것에 대한 황당함과 자신의 판단을 거스르는 것에 분노를 느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다시 데려다가 매질하고 조롱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 자신의 분노 때문인 동시에 죄 없는 자의 고통이 유대인들이 분노를 어느 정도 해소하고 그들을 부끄럽게 하여 더 이상의 요구를 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죄 없는 예수님을 가장 무서운 십자가형으로 죽일 때 생길 양심의 가책을 피하면서도 백성들을 만족시키기를 바랐지만 그의 그런 생각은 결국 십자가에 죽게 할 예수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결백하다면 빌라도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편에 서서 변호하고, 유대인들을 막아야 하는데 그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정선에서 죄와 타협을 했고, 그것은 결국 악을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사야 535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의 예언을 이뤄지게 했습니다.

 

    빌라도가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6절에서 대제사장과 그 아랫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즉 신성모독을 했기 때문에 율법대로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빌라도는 또 다시 예수님을 관사로 데리고 가서 심문합니다. 앞의 18장에서 처음 질문한 것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정체성을 묻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너는 어디로부터냐라고 근원, 권세에 대해 물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그 질문에 답하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시지 않자 빌라도는 자기 권력의 막강함을 예수님이 생각하게 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 예수님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에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한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한이 아니면 빌라도도 예수님께 어떤 선고를 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는 어디로부터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는 않으셨지만 자신의 근원, 권위, 능력이 어디로부터인지를 암묵적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한 아래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빌라도는 자기 권한을 자기 맘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안절부절 못하며 무엇이 옳은 것이고,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자 예수님을 데리고 관사를 몇 번씩이나 오가면서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빌라도보다 자신을 넘겨준 자의 죄가 더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처음 심문한 대제사장 가야바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결백과 어떤 신적 권위를 느꼈을 것이고, 또 마태복음 27장에 나오는 대로 그의 아내가 꿈을 꾸고는 예수님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고 자기에게 경고한 것 때문에 예수님을 살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를 풀어주면 빌라도가 로마 황제의 충신이 아니라고 협박했습니다. 당시 로마황제는 신으로 숭배되었는데 예수가 자신을 왕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황제를 모독하는 반역자이고, 그런 예수를 놓아주는 것은 황제의 명으로 총독 역할을 하고 있는 빌라도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마치 자신들이 빌라도보다 가이사에게 더 충성스러운 것처럼 말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끌고 나가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첫째, 유대인들이 고소한대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에 대해 잘못을 발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모욕당하고 피흘리는 비참한 상태의 예수가 너희 유대인들의 왕이라며 그들을 조롱한 것입니다. 이에 군중은 흥분해서 없애라 없애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고 외칩니다. 빌라도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냐라고 다시 묻자 그들은 참람한 대답을 했습니다. ‘황제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 빌라도는 그 말을 듣고 그들의 집요함과 사특함에 혀를 내둘렀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면서 결국 자신들의 왕이신 하나님을 공식적으로 부인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면, 그래서 거짓말 하는, 하나님을 망령되게 하는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면 그런 노력으로 수호하려는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믿고 높이는 일이 더 확고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면서 하나님도 부인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도 불신하는 것임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는 것이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과 직결되어 있음을 강조하신 것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했으니 율법대로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정작 그런 말을 한 그 자신들이 하나님을 부인했고, 율법대로 죽임당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배교했습니다. 유대당국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즉 분수를 모르고 지나친 말과 행위를 한 참람죄와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죄 이 두 가지를 혐의로 제시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두 가지 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은 우리 대신 죄를 지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의 근본은 그 두 가지, 즉 참람죄와 반역죄이기 때문입니다. 참람죄는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죄이고, 반역죄는 하나님의 정당한 주권, 다스림에 대해 반항하는 것입니다. 감히 하나님을 판단하려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이 높아지려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인간이 하나님인 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자신들에 대해 옳게 판단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분노했고, 왕이신 그분을 죽이고 로마 황제를 왕으로 섬기겠다고 한 것입니다참람죄와 반역죄를 저지른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자들, 특별한 사랑을 받은 유대인들이 결국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배신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인간은 끝없는 욕심, 허황된 욕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판단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 불만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합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없이 그냥 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정체성,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정신적 유산, 민족의 우월함을 기억하게 하는 역사, 발전적인 미래를 소망하게 하는 근거, 사회를 유지시키는 규칙 같은 것을 제공해주는 기능만 남은 것입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랑하게 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종교를 흔들어 놓는 예수를 죽인 것이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도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인 농부들의 비유를 드신 것이나 탕자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결정에 불만을 형의 모습으로 유대인들의 모습,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신 것은 정확했습니다. 자신을 있게 하신, 모든 것을 허락하신, 주인이신, 부모이신 하나님을 짓밟고 있는 인간을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은 애초에 하나님의 영광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 아니라 사실 자신들이 모독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욱 사랑했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 허락해 주신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나 자신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멋진 집이든, 가정이든, 아름다운 자연이든, 평화로운 사회이든, 강한 국가이든, 영향력 있는 교회이든 그것들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헛된 것들로 종교를 만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전부를 잃어도 하나님이 나의 진정한 전부가 되시는 것을 믿는지 스스로에게 늘 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