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님이 고난을 통해 얻으신 것 (요 19:17-42)

따뜻한 진리 2015. 11. 1. 23:37

요한복음 19:17-4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빌라도의 선고가 내려지고 예수님은 나무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서 계셨던 예루살렘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올랐던 모리아산 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이삭이 자기를 불태울 나무를 지고 모리아산을 올랐던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로마인들은 처형이 범죄를 억제하는 효과를 지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형수에게 가장 고통스런 방법인 동시에 지켜보는 자들에게도 끔찍한 두려움을 주는 방법으로 십자가형을 사용했습니다. 죄수의 양쪽 손목과 겹쳐진 발에 쇠못이 박혔고, 못 박힌 곳이 체중에 의해 당겨지는 고통과 함께 그것에 의해 가슴이 압박되어 숨 쉬는 것도 고통스럽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서서히 오래도록 고통스럽게 지옥을 맛보며 죽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그렇게 소름끼치게 잔인한 사형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시행하는 로마인들만큼은 어떤 악행을 저질러도 십자가형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죄목이 적힌 패찰이 달렸는데,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한 히브리어 방언인 아람어와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혔습니다. 그 칭호는 유대인들을 화나게 했고, 유대인들은 그 앞에 “자칭”이라는 말을 추가하라고 항의했지만 유대인들의 압력 행사에 우유부단했던 빌라도가 이번에는 자기가 쓴 내용을 바꾸기를 거절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광신적인 민족주의가 예수님을 무죄한 희생자로 만들었음을 조롱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왕이라는 그 문구는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왕으로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형 집행을 하던 군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겼고, 신포도주를 드신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후 그 영혼이 떠나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의 다리를 꺾는 것은 죽어가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방법이었는데, 예수님이 이미 죽은 것으로 판단한 군인은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고, 거기서 물과 피가 쏟아졌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십자가에서 내려져서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렇게 유대인들이 원하던 대로 예수님은 유월절이 시작되기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고통 당하셨다는 것입니까? 그 점이 가장 많이 강조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국민의 80%가 카톨릭인 필리핀에서는 부활절마다 사람들이 실제로 손과 발에 못을 박으며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을 재현합니다. 또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는 예수님의 고난을 잔인할 정도로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합니다. 그 영화를 제작한 감독은 배우이기도 한 멜 깁슨인데 카톨릭 신자입니다. 카톨릭은 그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한 고난을 실제적으로 공감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한국 교회도 부활절을 앞둔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고난을 중요하게 기념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죄, 나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그런 고난을 실제로 당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을 자세히 생각하는 것, 상상하는 것, 그것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자칫하면 카타르시스, 감정 정화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예수님의 비참한 고통에 내가 참여한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죄송스런 마음 때문에 나의 거친 감정이 잠잠해지는 효과를 얻는 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묵상해야 하지만 그저 예수님의 비참함에 몰입하는 것은 빌라도가 유대 군중에게 기대했던 효과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비참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저자 요한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많이 아프셨다, 끔찍했다는 사실만을 전달하려고 죽으시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이 사실이었고, 실제였던 만큼 그것으로 얻고자 하신 것도 실제이고,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순국 선열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칭송은 하지만 그래야만 했던 비참한 현실인 일제의 만행을 가린다면, 또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이었고, 그 고난으로 무엇을 얻었는가를 가린다면 그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고난 자체를 숭고하게 여기는 것은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 만족해라.’ 하면서 인간을 고본고분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숭고한 것은 그것으로 얻는 것이 숭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 비참한 고통을 실제로 적극적으로 당하셨다는 것은 그것으로 얻는 것이 어떤 것보다 실제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로 드러나는 진실과, 십자가로 얻게 되는 결과가 어떤 것보다 이 세상에 중요한 것입니다.

 

    그 실제적인 것은 첫째,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 몸으로 실제적인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는 것은 그 고통만큼이나 하나님의 영광이 실제적인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가장 분명하고, 실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진짜 몸으로 실제적인 고난당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실제적인 영광은 거룩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죄를 가볍게 무시할 수 없는 절대적 판단자이심을 십자가에서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신들이 모든 선악의 판단자가 되어 제멋대로 하려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자신이 죽지 않은, 무력하지 않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이 분명하게 살아 있어서 인간을 판단하고, 결국에는 완전한 심판으로 끝내실 것임을 십자가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증거를 십자가라는 실제 사건을 통해 최종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들이 죽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사랑을 실제로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말로만 사랑을 표현하시지 않고, 눈에 보이는, 부인할 수 없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대신 죽여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것으로 사랑을 실제 보이셨습니다. 죄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실제적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실제가 아니라 죄가 가장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이 죄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근심하고, 고생하고, 분노하고, 죽이고 죽는 실제적인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고통의 실제적인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랑을 가장 실제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사랑이 드러날 것을 기대하며 십자가의 고난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으로 실제 얻으시려는 것은 두 번째, 예수님 자신의 왕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단지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들의 죄 값을 대신 당하고 우리를 살려주시는 대신 자기 백성 삼으셔서 우리의 왕이 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를 얻으시기 위해 예수님이 대신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살리셨으니,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이 합당한 것이며, 복된 것임을 우리가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다스림을 기꺼이 즐거워할 자들의 왕이 되시기 위해 그들 대신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유대인의 왕, 온 세상의 왕으로서 높이 들려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실제적 고난으로 얻으시는 세 번째 것은 우리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실체가 죄인인 것을 드러내고, 동시에 죄가 어떻게 해결되는지도 보여줍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으려면 우리는 앞에서 말한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왕 되시려는 예수님을 기꺼이 환영하고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며, 또 주님이 우리의 왕 되시는 것이 우리에게 복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죽을 죄인인 것을 인정합니까? 그것을 시인하는 자만이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를 대신해 죽으셔서 왕권을 행사하는 것을 마땅히 여길 것입니다. 그런 성도는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과 거룩과 구원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피조물인 우리는 영원의 관점에서 가장 실제적인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왕 되신 주님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말해줍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헛된 것, 거짓에 속고 있음을 폭로해주고, 동시에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우리가 유념해야할 실제적인 것인지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할 때마다 이 세상의 실체, 인간의 실체, 세상의 종국을 보고 그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해결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자기 것으로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사랑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나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임을 알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