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9-3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 인간은 본성상 무엇인가를 예배합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칠 대상, 푹 빠질 대상을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래 하나님을 그렇게 예배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분 이외의 것들을 숭배할 때 그것은 반드시 인간을 파멸시킵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받아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허무와 중독, 죽음, 멸망을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유일한 예배 대상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경배를 받으실 수 있고, 우리에게 참 만족을 주십니다. 그래서 십계명 중 1에서 4계명은 우리에게 그 예배에 관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할 수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게 하고, 우리에게 회복과 은혜를 보장해줍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나, 순서들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하신 날, 주일에 제자들이 숨어 있는 곳에 찾아오신 이야기를 두 번 말하는 것은 예배가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첫째, 예배는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예수님이 시작하셨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먼저 다가오셨고, 구약에서 제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예배할 수 있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력한 제자들에게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자신을 예배하도록 부활하신 주일에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예배하는 것을 통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리도록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며, 먼저 다가오셔서 초청하시는 것이며, 우리를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주시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려는 그것은 평안입니다. 평안은 모든 것이 충족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죄 때문에 평안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고통과 결핍 속에 살아갑니다. 제자들도 언제 유대인들이 공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문을 닫아 놓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곳에 찾아오셔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그냥 인사치레가 아니었고,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을 근거로 진정한 샬롬을 확인시켜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두려움을 내쫓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고통과 미래의 불안이 주님의 부활 속에서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려움에 위축되어 장래를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함께하시고 책임지신 것처럼, 그것이 부활로 증명된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평안을 누리려면 먼저 해결 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평안을 깨뜨린 죄의 해결입니다.
세 번째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려는 것은 죄 용서를 통한 새로운 관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평안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2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구절은 죄용서의 권한을 교회가 갖는 것으로 해석되곤 했는데, 그 교회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면 타당하겠지만 사람들은 그런 의미로 해석하지 않고 교권, 교황, 성직자가 그런 죄용서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 줄 알고,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죄가 용서된 것을 믿는다면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상대의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표현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극에 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를 용서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 용서를 통해 열린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누리는 사람은 그 안으로 누군가를 초청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라고 제자들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또 21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죄 용서를 선포하셨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초청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그런 평안의 복음을 우리가 경험하게 하고, 나아가 우리가 그런 복음을 전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고 동시에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의 믿음이 형성되게 하십니다. 도마는 어쩐 일인지 다른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서 숨어 있을 때에 거기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동체를 이탈하여 홀로 고민하고 무엇인가를 결정하려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도마에게 전했고, 도마는 다음 주일에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도마가 믿을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가 말한 대로 십자가의 흔적이 있는 부활의 몸을 보여주셨고, 만져보고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보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믿음을 심어주셨지만 27절에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9절에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위하셨지만 우리처럼 예수님을 눈으로 보지 못해도 믿고 예배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주님은 예배 속에서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길 원하시는 동시에 예배를 통해 믿음을 견고케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우리의 심령 가운데 역사하시는 것으로 자신이 살아계신 것을, 함께 하시는 것을 우리가 알게 하십니다. 한 가지는 성경 말씀이 참으로 자신의 말씀임을 깨닫게 하셔서 믿게 하십니다. 다른 한 가지는 성령을 통해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게 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시지만, 동시에 믿음을 주시려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예배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첫 날, 그 주일부터 예수님은 예배를 가르치신 인도자셨고, 예배로 초청하시는 전도자셨고, 믿을 수 있도록 자신을 보이셨고, 예배를 받으시는 경외의 대상이셨습니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더욱 향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놀라운 특권입니다. 예배를 통해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십니다. 세상의 것들은 우리가 마음을 쏟아도 실망만 안겨주고 우리를 피폐하게 하지만 예배를 받으시는 주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오히려 소생시키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보지 못한 주님을 믿고 예배합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되면 우리는 주님을 마주하고 예배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이 마주하고 예배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 분 앞에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감격하며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주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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