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15-25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주님을 따르는 일과 자신들의 생계에서도 실패를 맛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아침 식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이끌고 가시는 일, 책임지시는 일에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어지는 요한복음의 마지막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다시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내용으로 마무리됩니다. 주를 믿는 것은 자기 주도권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특별히 베드로와의 대화를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전에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잡히셔서 심문받고 계실 때 그는 불을 쬐고 있으면서 주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 때처럼 베드로는 타는 불을 사이에 두고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밝히는 질문을 세 번 받았습니다. 더 이상 당당할 수 없는, 모래처럼 무너져 내린 그를 주님은 반석, 베드로라고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지어주신 그 이름 대신 그를 원래의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실상을 꾸짖지 않으셨지만 그냥 지나치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에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일관되게 대답하면서도 막상 주님이 세 번째 질문을 하시자 근심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세 번 부인한 것이 생각났을 것이고, 대답하는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한대로 주님은 그런 베드로의 고백이 그 자체로는 불완전함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불완전한 그에게 자신의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처음에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 말씀대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자기 양들을 맡기신 것으로 이제 베드로는 자기의 삶을 살 수 없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 그는 주님을 따르며, 주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더욱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주권을 우선시하며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자기 양들로 여기시고(10:29) 아버지가 원하신 십자가로 가신 것처럼 베드로도 주님께서 맡기신 양들을 돌보며 주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삶이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베드로가 십자가형으로 죽게 될 것을 완곡하게 표현하신 것으로 해석됩니다. 주님은 그런 길로 "나를 따르라"고 19절, 22절에서 베드로에게 반복 명령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한 것 같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아버지의 뜻에 따르신 것처럼 자신도 보내시는 주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임을 알아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만 그런 삶을 사는 것인지 다른 제자들도 그런 삶을 사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요한 이 사람은 어떻게 되냐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게 한다 해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요한이 죽지 않고 예수님이 재림할 때 까지 살아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쓰임을 받는다 해서 우리가 주님께 이의제기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실제로 오래 살면서 주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요한복음은 믿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진 자는 어떤 삶을 사는 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이 그 믿음을 설명합니다. 주님은 나를 믿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성경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제자들도 믿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 믿습니다. 구원해 줄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도구, 도움의 수단으로만 여깁니다. 우리는 머리로는 아니라고 해도 실천적으로 그러기 쉽습니다.
주님께서 5:42절에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핍박했고,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예수님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사탄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직접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십자가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모범을 보이셨고, 부활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인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 각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랑이심과 그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모두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충분히 보이셨고, 그것을 전제로 나를 사랑하냐고, 하나님이신 자신을 사랑하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믿느냐?’가 전제된 것입니다. 제자들과 베드로는 그 질문을 받기 직전까지도 그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주님이 사랑이심을 부인할 수 없기에 그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을 때 주님은 자기 양을 맡기셔서 우리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주님을 따를 수 있는 멍에를 지우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헛된 것에 빠지지 않고 주님만을 의지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주는 장치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양들, 교회를 돌보고 먹이면서 자기 역시 양으로서 주님께서 돌봐주시고 먹여주셨던 때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맡겨진 양들을 베드로가 돌볼 수 있도록 사랑을 부어주시며, 먹일 수 있도록 양식을 공급하시는 분은 여전히 참 주인이신 예수님이신 것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맡겨진 일을 통해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했지만 주님이 아신다고 대답한 그의 말대로 주님은 베드로가 진정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계셨습니다. 양들을 돌보며 주님을 위해 고난당하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이후 주님이 예언하신 그 길, 이미 알게 된 고난의 길을 가면서 자기만 겪는 고통이라고 불행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가 가는 길을 알고 계셨다는 것, 주께서 아시면서 그 책임을 부여하셨다는 것에서 주의 사랑을 확인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고난의 길을 먼저 가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을 아시면서 그 십자가의 길로 가셨었고, 그 길은 이미 정해 놓으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시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신뢰하신 것처럼 베드로도 자신이 죽게 될 그 길의 끝을 가깝게 볼수록 자신이 주님의 길을 걷고 있음을, 주님을 따르고 있음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베드로에게 그 길을 미리 알게하시고 보내신 이유는 "나를 따르라“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합니다. 그 따름은 예수님처럼, 보낸 분이 정해준 고난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정말 예수님처럼 맡겨진 양들을 위해 순종하다가 십자가에 달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겪게 되는 인생길, 앞날은 모두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탄한 길을 가겠고, 어떤 사람은 고생길을 갈수도 있습니다. 어떤 길을 가느냐로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가치, 존재 의미는 우릴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로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주님이 남들보다 험한 길로 자신을 인도하실지라도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대로 그 길을 갈 것입니다. 어떤 길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길에서 주님은 계속 물으실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나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가 부인한 베드로처럼 책임을 지지 못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한다 해도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 앞으로도 베푸실 그 사랑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붙잡고 끝까지 이끄실 주님을 믿는 자는 믿음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포함해서 세상 어떤 것도 아닌 주님만을 신뢰하기 때문에 주님밖에는 사랑할 대상이 없으니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어떤 길이든 주님이 알고 계신, 먼저 가신 그 길이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라면 갈 것입니다. 영리 목적으로 설교를 스크랩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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