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1:1-9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가 여호수아서를 이해하기 위해 여호수아라는 인물에 대해 먼저 살펴보면, 여호수아의 이름은 본래 호세아였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모세와 함께 나온 보좌관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수아가 언제 등장하냐면 출애굽기 17장에서 홍해를 건넌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우게 되었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이제 막 탈출했는데 무슨 군대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는 오합지졸인 이스라엘 남자들을 이끌고 전투를 수행하라고 누군가에게 맡깁니다. 그 사람이 여호수아입니다. 그 때 아말렉을 어떻게 이겼습니까? 모세가 산 위에서 기도하는 자세로 팔을 들고 있으면 산 아래의 이스라엘이 이기고, 지쳐서 팔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아론과 훌이 옆에서 해가 질 때까지 두 팔을 붙들고 버텨서 결국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또 민수기 14장을 보면 가나안 정탐을 갔다가 돌아왔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에는 여호와께서 주신다는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없는 땅으로 여겼습니다. 다수인 열 지파 정탐꾼들에 의해 여론이 주도되었고 백성들은 원망과 불평을 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 있었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라고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생활을 하는 중에도 계속 출애굽 하게 하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원래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수많은 자손과 땅을 약속하셨는데, 출애굽 한 백성들은 그 약속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실제 보니 너무나 좋았지만 그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죽이려는 것이라고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의 모든 출애굽 1세대를 광야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 자녀 세대들만 여호수아, 갈렙과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면 1절에서 모세가 죽은 후임을 말하고 2절에서도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라는 말로 하나님께서 모세의 죽음을 확인하시면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전에 약속하셨던 것들을 다시 확인시켜주십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된 땅을 얻게 될 것이라고, 여호수아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강하고 담대하라.”는 격려가 6절, 7절, 9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강하고 담대하라”라는 말을 반복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격려의 반복이 암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수아는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쓸데없이 반복해서 격려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완전히 아셨습니다. 분명 여호수아는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물론 여호수아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후계자로서 광야에서 훈련을 받아왔고 또 모세가 죽으면서 그에게 안수했습니다. 그동안 준비과정을 밟았지만 실제로, 여호와의 말씀이 현실이 되었을 때, 말씀에 순종해야할 순간이 찾아왔을 때 믿음이 있지만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어서 7절을 보면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라고 말씀하셨고, 이어서 8절에서 구체적 실천방법을 말씀하셨는데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참고해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출17장 13-14절입니다. 앞에서 이야기 했던 여호수아가 처음 활약했던 그 아말렉과의 전투가 끝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이 때부터 기록된 말씀에 근거한 훈련을 시키셨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말씀을 기록해서 여호수아가 외울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하셨습니까? 인간은 아무리 엄청난 경험을 해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가르쳐주신 방법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늘 묵상하는 것, 늘 눈앞에 두고, 입으로 읽고, 그것을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외우고, 그래서 눈앞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마음 속에서 어떤 감정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수아 자신을 통제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과거에 그러셨듯이 앞으로의 전쟁도 사람의 능력, 지혜, 전술, 군대의 전투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것임을 기억시키는 것입니다. 앞으로 들어갈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승리로 점령하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장 2절, 3절, 6절, 11절, 13절, 14절, 15절에서 두 번 이렇게 총 여덟 번에 걸쳐 여호와께서 ‘주신’ 땅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수아를 사로잡지 않으면 그는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누구시며,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또 실제로 지난날 전쟁을 어떻게 승리로 이끄셨는지를 계속 기억하게 만드는 일을 그분의 말씀이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백성들이 기대하지 않는, 두려워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비옥한 땅 애굽에서 적당히 종살이 하면서 살았으면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하나님은 굳이 위험한 전쟁을 무릅쓰고 가나안땅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구원이 사람의 바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옳다고 여기시는 일, 하나님이 좋게 여기시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그저 우리의 안목에서 피하고 싶은 나쁜 것, 힘든 것, 지옥 이런 것을 제거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당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겪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그저 우리 생각에 좋은 것만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먼저 부르셔서 기대하지 않은 일방적인 약속을 주셨습니다. 또 애굽에서 종살이의 고통 때문에 부르짖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대로 해방만 주지 않으시고, 율법을 주셨고,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것들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구원하려는 자들이 결국 그것을 받아 누리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선한 것임을 결국 깨닫게 하십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가나안 땅에 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까? 두렵고, 고생스러운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구원하시려는 자는 이 땅에서 그 신뢰의 훈련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목적이 아니라 믿음이 목적입니다. 그 주신 율법과 땅이 선택하신 자를 끝까지 구원 얻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도록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주어집니다. 거룩한 삶, 하지 말아야 하는 것과 지켜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믿음을 가지면서 세상 속에서 승리를 기대하는 것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똑같이 생존해야 합니다. 불가능해 보입니다. 두렵습니다. 죽을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출애굽 1세대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말도 안 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들을 죽이려고 작정하신 것이라고 의심하며 불평했던 것처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선한 것임을 믿고 그것을 얻기 위해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위한 긴장감 있는 삶, 예수를 믿는 지금의 삶이 믿기 전 보다 더 낫다고 여깁니까? 이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강하고 담대하라”는 명령에 가까운 하나님의 격려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여호수아를 계속 살피면서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고 주시려는 것도 선한 것임을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이 그것을 증명하고, 우리에게 기억시킬 것입니다. 또 그것을 우리가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로나 좌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려는 동기부여를 얻게 될 것입니다.영리 목적으로 설교를 스크랩하지 마십시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탐을 통해 얻은 것 (수 2:1-24) (0) | 2015.12.20 |
---|---|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수 1:10-18) (0) | 2015.12.13 |
주의 사랑에 매여 따라가는 제자 (요 21:15-25) (0) | 2015.11.29 |
실패한 제자들과의 아침식사 (요 21:1-14) (0) | 2015.11.22 |
참된 예배를 보여주신 주님 (요 20:19-31) (0) | 2015.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