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1:10-18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얻는 일을 믿음으로 시작하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 광야를 지나 요단강 동편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허락하실 땅은 요단강 건너편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가야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양식을 준비하게 했고, 사흘정도 후에 요단을 건너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먼저 교회 안에서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이 잘못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잠깐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인들이 ‘OO가 요단강을 건넜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죽었다는 의미로 그런 표현을 합니다. 그런 의미로 사용하는 이유는 요단강을 건너서 가는 가나안 땅을 천국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중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이라는 곡을 보면 후렴구에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영어 원곡을 번역하면서 잘못 의역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래 전부터 가나안 땅을 천국이라고 잘못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전쟁도 없는 완전한 곳인데 가나안은 전쟁을 통해 얻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은 성도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현실과 관계가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홍해를 건넌 것과 함께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홍해를 건넌 것은 구원을 위한 죄용서, 거듭남을 의미한다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불신앙, 불순종을 버리고 순종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주시지만 성도는 그런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참주인으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런 신앙이 없어서 광야세대는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모두 죽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은 그 불신앙과 불순종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홍해를 건너게 해주신 하나님의 뜻, 자기 백성 삼으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은혜, 승리,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요단강 건너는 것이 상징합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요단강 건널 준비를 시켰을 뿐 아니라 이어서 르우벤, 갓, 므낫세 절반 지파에게 무장하고 다른 형제들보다 앞서서 전쟁에 참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왜 그런 말을 했냐하면 이 세 지파는 이미 요단강 동편의 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세 시대에 하나님께서 헤스본과 바산을 이기게 하시자 그 땅을 달라고 해서 얻었습니다. 요단 동편지역 땅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에 포함되기는 했지만 그 때는 아직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한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민수기 32장을 보면 르우벤과 갓 자손들은 자신들에게 가축 때가 심히 많고 그 승리를 주신 지역이 목축하기에 좋은 땅이니 그 땅을 자신들에게 줘서 요단강 서편에 건너가지 않게 해달라고 모세에게 요청했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요구가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기 때문에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민32:14)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파들은 자신들이 동편 땅을 먼저 얻더라도 요단 서편을 얻는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제안을 하면서까지 모세의 동의를 받아냅니다. 그들은 전쟁을 잘하는 용사들이 많은 지파들이었고, 이스라엘 내에서 세력이 큰 만큼 자신들의 견해를 강하게 표출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모세도 그들의 요구를 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비롯한 지도자들에게 반드시 그 지파들이 약속한대로 요단강을 건너가게 해서 전쟁에 참여시키라고 당부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 지파들에게 그것을 기억시키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요단 동편의 지파들은 그 약속대로 행하겠다고, 여호수아 당신이 명령하면 자신들이 다 행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17절을 보면 “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범사에, 모든 일에 모세에게 순종했었습니까? 아닙니다. 요단 동편 땅을 받아낸 것 자체가 불순종입니다. 또 13장 13절을 보면 나중에 그 세 지파가 여러 이방 족속들을 쫓아내지 아니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순종했던 것처럼 여호수아에게 순종한 것이 아니라 모세에게 불순종했던 것처럼 여호수아에게도 교묘하게 불순종했습니다. 모세에게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타협했던 것처럼 여호수아의 말에도 완전히 순종하지 않고, 적당히 순종했습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가나안에서 하나님이 주실 땅을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장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기 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그냥 놓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회가 왔을 때 자신들의 안전과 풍요를 미리 선점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 1세대는 과거 애굽의 삶을 돌아보는 자들이었지만, 세 지파들은 장래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안식을 만들어내려고 했습니다. 진정한 성취, 진정한 안식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누리게 됩니다. 세 지파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7절 18절을 보면 여호수아에게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눈에 보이는 땅을 확보해 놓은 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적인 안심을 하고 순종한 것입니다. 손에 쥔 것이 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수고를 감당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고생하고 피흘려도 그 땅에 남은 가족들은 안전하고, 평안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아쉽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의 순종은 어떤 면에서 이미 확보한 것에 대한 보장을 기초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미 허락해주셨으니,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니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잃을 것이 없는 싸움이고 순종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보장이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 하나님의 신실하심 자체를 보장으로 여길 것을 원하십니다. 세 지파처럼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이 땅에 쌓아 놓은 것, 자기 기반을 보험으로 여기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음에도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요단강은 그런 의미입니다. 이제 앞으로 가면 적들에 의해 내가 죽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허락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우리에게 있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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