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1-24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하게 했고, 정탐꾼 둘을 요단강 건너편 여리고성으로 보냅니다. 정탐꾼들이 기생의 집에 들어간 이유는 아마도 15절에 나오는 대로 성벽 위에 그 집이 있었기 때문에 여리고성에 도착하자마자 빨리 은신할 수 있었던 곳이고, 또 그곳이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신분 노출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탐꾼들의 의도와 달리 그들의 잠입 사실이 여리고 왕에게 보고되었고, 정탐꾼을 색출하러 군사들이 왔습니다. 정탐꾼들은 두려웠을 텐데, 그 집의 기생 라합은 두 정탐꾼을 지붕에 숨기고 찾으러 온 군사들에게는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어두워질 때 쯤 성 밖으로 나갔으니 빨리 추격하면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군사들을 따돌린 후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말을 꺼냅니다. 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라는 말로 시작해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지나게 하신 것과 요단 동편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을 멸하신 것에 대해 알고 있다고 라합이 말했습니다. 이것은 여리고 백성들이 출애굽에서부터 요단강 동편의 땅을 세 지파가 얻게 된 그 전쟁 까지, 즉 40년 전부터 최근의 사건까지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라합은 자기 동족들이 여호와께서 하신 일 때문에, 또 여호와께서 자기 나라를 포함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 주신다는 소식 때문에 정신을 잃을 만큼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늘 위로나 땅 아래로나 참 신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을 살려달라고 부탁을 했고, 정탐꾼들은 나중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여리고성을 주실 때에 라합과 가족들이 모여 있는 곳임을 알 수 있도록 붉은 줄을 창문에 매 놓을 것을 제시합니다. 라합은 약속한 그 창문에 줄을 달아 정탐꾼들을 내려 보내어 돌아갈 수 있게 합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이 돌아가다가 여리고성 군사들과 마주칠 수 있기 때문에 사흘 동안 산에 숨어 있다가 가라고 일러줍니다. 정탐꾼들은 그렇게 숨어 있다가 다시 요단강을 건너 여호수아에게로 돌아가서 있었던 일들을 보고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먼저 여리고와 라합의 위치에서 생각해봅시다. 먼저 여리고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아무 책임도 없는데 여호와라는 신이 일방적으로 자기들의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에게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를 비롯한 이방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라합처럼 말입니다. 구약 당시는 나라의 흥망성쇠, 전쟁의 승패는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믿는 시대였습니다. 신들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렇게 다른 민족의 신에 대해 알 수밖에 없는, 알아야만 하는 시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배경을 사용하셔서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라합의 말에서 드러나는 대로 여리고는 40년 전부터 이스라엘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이스라엘을 통해 자신을 알리신 것을 기준으로 가나안 족속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올 위기를 앞두고 결단해야 했습니다. 여리고 백성들에게는 라합처럼 믿음으로 반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끝까지 싸우면서 버티려 했습니다.
다음으로 라합에 대해 생각해보면, 여리고 사람들의 관점에서 라합은 동족을 배반하고 스파이들을 도와준 사람입니다. 자신과 가족은 살겠다고 정탐꾼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면 라합은 비윤리적이라고 비판을 받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을 보면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하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라합을 평가합니다. 라합은 이방의 여러 우상들과는 다른 여호와 하나님을 인식했고, 인정하고 믿었습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믿었습니다. 또 라합은 목숨을 걸고 정탐꾼들을 도우며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정탐꾼들이 제시한 생존의 방법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라합처럼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심판 중에서도 구원하십니다. 라합을 비롯한 믿음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가 속한 세상이 어떠하든지, 시대가 어떠하든지 우리는 개인적인 고백과 결단을 하며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과 정탐꾼의 관점에서 생각해봅시다.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보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땅이 궁금해서 알아보려고 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이미 40년 전에 모세가 열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자신이 거기에 속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때 자신을 포함한 단 두 명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던 것을 기억해서 그랬는지 이번에는 두 명만 선별해서 정탐꾼으로 보냈습니다. 그 땅이 좋은지, 누가 살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실 것을 믿고 여리고성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적 정보를 얻으려 한 것입니다.
그러면 두 정탐꾼이 스파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한 것 같습니까? 나름 가장 용감하고 판단력이 좋고 민첩한 사람들이 스파이로 뽑혀서 갔을 것인데 라합의 집에 숨었다가 탄로가 나서 가자마자 잡힐 뻔했습니다. 그들은 라합이라는 천한 여자에 의해 보호를 받고 안내를 받습니다. 스파이들에게 기대되는 임무수행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리고성에 대한 군사적 정보를 얻지는 못하고, 오히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아주 위험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자신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라합의 고백을 통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여리고성 사람들의 마음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얻은 것은 사람이 전쟁준비를 하는데 필요한 정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승리를 준비하고 계심을 믿게 하는 소식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순종할 마음을 준비시키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약속된 것을 잘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들은 이방의 천한 여인이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두려워하는데 우리의 마음 상태는 어떠한가를 반성하면서 용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1장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격려하신 내용이었다면 본문 2장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하나님이 격려하신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가나안 족속이니 이스라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여호와 나를 신뢰하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보다 강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강한 것 같으나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한계 아래에서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세상은 건강과 재산과 명예를 잃을 것에 대해 두려워합니다. 세상과 세상 사람은 여리고 사람들처럼 삶의 위협이 다가오면 녹아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승리하셔서 우리에게 약속된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승리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으로 인한 두려움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위해 크고 작은 격려들을 하시는 것을 잘 듣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염려와 걱정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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