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2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룻과 나오미는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보리추수를 하는 때에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보리추수 때라는 것은 단지 시기를 말할 뿐 아니라 룻기 이야기의 배경이 됩니다. 1절은 나오미의 친척 중에 보아스라는 부유한 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넌지시 알립니다. 우리는 당연히 나오미가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고 기대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 친척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빈손으로 돌아온 어려운 형편이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하는 고귀한 헌신을 했지만 다른 사람의 밭에 가서 이삭줍기를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룻은 누구의 밭이든 거기서 은혜로 허락을 받으면 이삭을 줍겠다고 나오미에게 말했고, 나오미는 “내 딸아 그렇게 해라”라는 말로 미안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보내야하는 애틋한 마음으로 룻을 허락했습니다.
룻이 보리추수 하는 자를 따라서 밭에 갔는데 그 밭은 1절에 등장한 보아스에게 속한 밭이었습니다. 3절이 말한 대로 룻은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그 곳에 간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보아스가 소개될 때 나오미와 아무런 인연이 닫지 않았던 아쉬움이 여기서 풀릴 듯 기대를 하게 됩니다.
그 기대대로 그때 “마침” 보아스가 밭에 왔습니다(4절). 보아스는 등장할 때부터 남다른 보습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일상적인 인사는 ‘샬롬’ 하면서 평안을 묻는 것인데, 보아스는 자기 밭에 일하러 온 일군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인사를 합니다. 보아스는 자기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이삭을 주우러 온 사람들을 확인하다가 처음 보는 사람이 있음을 알아챘고 그 소녀가 누구인지를 관리자에게 물었습니다. 관리자는 그 소녀가 나오미와 함께 온 모압 소녀인데 아침부터 와서 잠시 쉰 것 빼고는 계속 이삭줍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보아스는 이미 나오미에 대한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룻에게 다른 밭에 가지 말고 자신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면서 추수하는 자들을 따라 곡식을 주우라고 말했습니다. 또 그는 자기 일꾼들에게 룻을 방해하지 말라고 했으니 안심하라 했고, 일하는 소년들이 길어온 물을 룻도 편하게 마실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배려를 받은 룻이 보아스 앞에 엎드려 자신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는 이유를 묻자 보아스는 자신이 알고 있었던 사실, 룻이 자기 고향을 떠나 시어머니를 따른 것을 칭찬하면서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기를 원한다고 축복했습니다. 식사시간이 되자 보아스는 일꾼들을 위해 준비된 떡과 볶은 곡식을 룻에게도 나눠주었고, 또 초를 찍어 먹게 해주었는데 그것은 신맛이 나는 드레싱 같은 것으로써, 시큼한 음식이 그렇듯 미각을 돋우고 피로감을 덜어주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또 보아스는 룻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일하는 소년들에게 추수할 때 일부러 곡식다발을 조금씩 남겨두어 룻이 많이 가져갈 수 있게 했습니다. 이삭줍기는 가난한 자들의 생존 수단이기 때문에 율법은 추수 때 이삭을 다 걷어가지 말고 모퉁이만 남겨두어 가난한 자들이 취할 수 있도록 하라고 되어 있지만 보아스는 율법의 그런 요구를 넘어서 룻에게 충분한 것을 주려고 일꾼들에게 지시했습니다. 보아스는 단지 물질적인 도움 주는 것을 넘어 자신의 배려에 대해 자칫 룻이 부담을 갖거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고려했습니다. 그렇게 보아스는 룻이 자기 밭에 머무는 동안 필요한 것들을 예상하고 공급해주었고, 안심하고 부담 없이 자신의 밭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그런 배려 속에서 룻이 하루 동안에 보리 한 에바 정도를 주웠다고 하는데(17절), 에바는 우리나라의 되, 말 같은 부피 단위로서 약 22리터 정도인데 비슷한 양의 쌀 무게로 환산하면 약 17kg 정도 되는 양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줍기를 하루해서 그 정도를 얻었다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보아스의 깊은 배려심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룻은 이삭줍기 한 보리와 자신이 남긴 음식을 나오미에게 건네며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중에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그 밭의 주인이 보아스임을 밝혔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그 밭에 머물라고 말합니다. 이삭줍기에서 더 나은 소득을 위해 여건이 좋은 다른 밭에도 기웃거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보아스의 밭에 머문다는 것은 보아스를 신뢰하고 그의 은혜만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서로를 배려하고 신뢰하고 의지하는 선한 일이 본문에서 그려집니다. 우리는 본문의 의미를 풍성히 알기 위해 그 시대적 배경이 1장 1절에서 언급한 대로 사사시대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때는 다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형식이었고,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자기중심적인 태도들을 보이던 때입니다. 사사들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가 그랬고, 여러 지파들이 사건을 판단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말 그대로 형식적이었기 때문에 실제 삶의 행동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자기 소견대로였고, 그것들이 모여 악의 조화를 이뤄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여호와의 이름을 형식적으로, 말로만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이미 실천하며 자신이 발언한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를 몸소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아스가 룻에게만 사심이 있어서 특별한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보아스가 4절에서 일꾼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의 화답을 보면 이미 그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8절에서도 보아스가 말한 “나의 소녀들”이라는 말은 룻 외에도 이미 거기서 이삭줍기를 하던 여인들이 있었다는 뜻인데, 만약 보아스가 룻에게만 차별적으로 잘 해줬다면 다른 소녀들의 눈총 때문에 룻은 보아스가 말한대로 그의 밭에서 오래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23절에서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과 가까이 있으면서 추수를 마칠 때까지 잘 있었다는 것을 보면 보아스의 배려심은 그의 밭에서 어느 정도 일상적인 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보아스는 신앙적인 표현과 삶이 어느 정도 일관된 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인 우리가 누군가를 위로하고, 격려할 때 우리가 소망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우리의 그 말과 행위를 통해 상대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일일 것입니다. 12절에서 보아스가 룻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했을 때 룻이 말한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 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라는 고백은 보아스의 말대로 하나님이 날개로 보호하시듯 기억하시고 보살피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룻이 보아스의 친절을 통해 경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룻은 보잘 것 없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는 것을 보아스를 통해 느꼈기 때문에 보아스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서도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두운 사시시대 속에서도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신실하게 찾는 자들에게 은밀하게 은혜를 베푸셨고, 그런 서로가 절묘하게 만나도록 인도하셨고, 서로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 시대는 종교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사사시대와 다를 바 없는 때이지만, 룻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처럼 우리도 항상 하나님을 선택하며 따르길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세상의 눈에 보기에는 빈곤한 이삭줍기와 같은 삶이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신, 은혜 베푸시는 분명한 증거가 있기에 보아스의 밭에 머문 룻처럼 우리의 삶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머무르기를 원합니다. 또 우리가 보아스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은혜의 자리로 사용되길 원합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아스의 기업 무름 (룻 4장) (0) | 2016.07.03 |
---|---|
기업 무름을 요구한 룻 (룻 3장) (0) | 2016.06.26 |
항상 선대하시는 하나님 (룻 1장) (0) | 2016.06.12 |
신앙 없는 윤리추구의 실상 (삿19-21장) (0) | 2016.06.05 |
자기소견에 옳은대로 신앙을 이용함 (삿17-18장) (0) | 2016.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