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3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이삭줍기에서 돌아온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보아스의 밭에 있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가 친척으로서 기업 무를 자 중의 하나라고 설명했습니다. 기업 무름이란 한 남자가 자식 없이 죽었을 때 그 형제나 남자 친척이 미망인과 결혼하여 그 가정의 대를 잇고 가업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업 무름의 책임이 있는 사람을 ‘고엘’이라고 합니다.
이 기업 무름 제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땅을 비롯한 재산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 누구도 빼앗아 가서는 안 되고 계속 대를 이어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위기에 빠진 사람을 보호하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잃은 미망인은 고엘에게 기업 무름을 요청할 권리가 있습니다. 나오미는 룻을 통해 보아스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를 기업 무를 자인 고엘로 기대했습니다. 나오미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다가 적절한 타이밍이 되었다고 판단했는지 드디어 적극적으로 일을 계획하고 추진합니다.
보리 껍질을 털어내는 타작은 뜨거운 낮의 열기가 식는 늦은 오후에 시작되어 어두워질 때 쯤 마치게 되고, 타작한 곡식을 옮길 다음 날까지 지키기 위해 일꾼과 주인은 타작한 곳에서 잠을 자곤 했습니다. 룻은 목욕을 하고 매력적으로 단장 한 다음 그 타작마당에 가서 보아스가 눕는 자리를 미리 알아 두었습니다. 일을 마친 보아스가 음식을 먹고 기분 좋게 자리에 누웠을 때 룻도 그 자리로 갔습니다. 서늘한 밤기운으로부터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보아스가 이불을 덮었는데, 룻이 그 이불의 발쪽 자락을 들추어 그 아래에 누었습니다.
보아스가 잠결에 놀라 자신의 발치에 누운 여인에게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룻이라고 밝히고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보아스에게 고엘의 의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면서 일종의 청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놀랐습니다. 이 이방 여인 룻이 고향을 떠나 시어머니를 따라 온 것도 대단한데 자기 나이에 어울리는 젊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포기하고 시댁 가문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이런 칭찬을 합니다.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보아스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룻의 헌신적인 사랑은 훨씬 더 깊고 성숙했던 것으로서 보기 드문 것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청혼에 즉시 답하지 않고, 자신이 기업 무를 의무가 있긴 하지만 룻의 시아버지인 엘리멜렉과 혈연 상 더 가까운 자가 있기 때문에 절차에 따라 그에게 먼저 의사를 물어보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어두운 시간에 룻과 함께 있는 상황을 조심스럽게 정리합니다. 왜냐하면 나오미가 룻을 통해 보아스에게 그런 청혼을 하게 한 것은 권리 행사이긴 하지만 남녀관계의 애정을 이용해 매우 과감하게 접근한 것이라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면 오해를 살 수 있는, 그래서 일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보아스가 애정을 갖고 있던 룻에게 반가운 청혼을 받았어도 자기보다 가까운 친척이 룻과 결혼하겠다고 할 수도 있고, 또 룻과 보아스에 대한 잘못된 소문이 퍼지면 기업 무름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사람들의 눈에 띠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룻을 보냈고, 또 보리를 한 가득 담아주고 돌아가게 했습니다. 보아스는 그만큼 룻을 아꼈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나오미도 생각했던 것입니다. 룻은 돌아가 시어머니에게 있었던 일을 알렸고, 시어머니는 룻에게 이 일이 어떻게 될지 윤곽이 드러나기 전까지 가만히 기다리라고, 보아스가 이 일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본문에서 룻은 철저히 나오미의 지시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룻에게 시킨 일은 인간적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친척과 결혼하는 기업 무름이라는 이스라엘 제도가 룻에게는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혹 보아스의 친절로 인해 룻에게도 애정이 생겼다해도, 보아스는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 의사보다는 가문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이 컸습니다. 둘째, 룻이 보아스의 발아래 누워서 요구를 한 그 때와 장소는 청혼하는 일에 적합하지 않았고, 고상한 방법도 아니었습니다. 셋째, 나오미가 판단한 보아스의 룻에 대한 애정이 예상과 다를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엘의 의무는 요청을 받은 남자에게 강제 사항이 아니라 거절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보아스가 룻은 좋아해도 고엘의 의무는 거절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럴 경우 룻은 민망하게 될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이런 일을 꼭 해야 되냐고 물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룻은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겠습니다.'(5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룻은 낯선 베들레헴에서, 시어머니를 위해, 기업 무름 제도 속에 들어가, 나이 많은 아버지 벌의 남자에게, 혹시라도 거절당할 때의 수치를 각오하고, 비천한 자세로 자기를 받아주기를 간청한 것입니다. 룻이 그 일에 잠잠히 순종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그렇게 곤란한 일에 순종하고 있다는 것을 헤아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룻을 “현숙한 여자”라고 칭찬했고(11절), 룻이 몹시 긴장하고 결과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느끼고는 두려워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청혼한 태도에서 우리는 매우 겸손한 요소를 발견하기도 하고 매우 과감하고 적극적인 요소도 보게 됩니다. 그런 양면성이 있는 태도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성도에게서도 나타나는데, 그것은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매달리는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비천함, 자격 없음을 알기 때문에 겸손하게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만 그분만이 유일하신 해결책이라는 것을 알기에 동시에 매우 적극적으로 매달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도는 그분의 결정만을 기다립니다. 마치 나오미에게 돌아와 기업 무름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기다리던 룻처럼 성도는 자신의 구원이 최종적으로 완성되기까지 자신을 위해 일하시는 주님께 집중하며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룻이 순종한 이 기업 무름 제도는 단순히 구약 이스라엘의 제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출애굽기 6:6-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속량은 그대로 두면 망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을 떠맡아 자기에게 속하게 하신 하나님의 행동을 뜻합니다. 죄와 비참 속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아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를 속량하거나, 대가 끊겨 사라질 가문을 무르어 거두어들이는 것이 구약에서 일관적으로 보여주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죄인인 우리의 모든 형편을 속량하시는, 죄로 실패한 우리의 결과들을 자기 것으로 떠맡아 기업 무름에 해당되는 구원을 베푸는 일은 예수님에서 완전하게 성취되는 것입니다.
사사시대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았지만 영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엘리멜렉의 가정은 인간적인 살길을 모색하다가 모든 것을 잃게 되었지만 며느리 룻이 자신의 길,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보여준 신실함과 순종을 통해 구원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구원이 오직 여호와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는 자는 자신의 자존심과 권리를 내려놓고 그리스도께 엎드려 그분의 결정만을 간절히 기다릴 것입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가 존재하는 이유 (행 1장) (0) | 2016.07.10 |
---|---|
보아스의 기업 무름 (룻 4장) (0) | 2016.07.03 |
머물고 싶은 은혜의 자리 (룻 2장) (0) | 2016.06.19 |
항상 선대하시는 하나님 (룻 1장) (0) | 2016.06.12 |
신앙 없는 윤리추구의 실상 (삿19-21장) (0) | 2016.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