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1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룻기는 1절에서 밝히듯 사사 시대에 있었던 한 가정의 일입니다. 앞의 사사기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무시하듯 이스라엘의 변질과 타락이 심각해지는 것을 암울하게 묘사했다면, 룻기는 개인에게서 나타나는 신실한 신앙을 희망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또 지난 시간 다루었듯이 사사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윤리적 타락으로 인한 희생자로서 여성들이 등장했는데, 룻기에서는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에 왕이 없는’ 영적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으로서 여성들이 중요하게 쓰임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룻기 마지막 장에 나타나지만 룻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 예수 그리스도를 찬란하게 예고했던 왕인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됩니다.
룻기의 시작은 이스라엘이 거하던 땅에 흉년이 들었던 때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서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단순한 자연 재해가 아니라 사사 시대의 영적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일부였음을 암시합니다. 흉년을 지나기 위해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떠났습니다. 1절에서 “거류”했다는 말대로 처음에는 모압에 잠깐 머물려고 했는데, 4절을 보니 그러다가 10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에 남편 엘리멜렉은 죽었고, 모압 여인들과 결혼 했던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그렇게 이방인 며느리 둘과 남게 된 여인의 이름은 나오미입니다.
나오미가 남편과 아들을 모두 잃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전부를 잃은 것입니다. 당시에 여자의 삶은 남편이나 아들에게 의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알거지가 된 시점에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에 풍년이 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가던 중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발길을 멈추고 두 며느리에게 모압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나오미의 그 판단은 현실적으로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었습니다. 돌아갈 고향 베들레헴에서 이방인 며느리들을 달가워하지도 않을 것이고, 모두가 어려울 때 떠났다가 빈손으로 돌아와서 기대려고 하는 자신을 고향 사람들이 좋게 봐주지도 않을 것이 때문입니다. 가족 중 남자라도 있으면 의지가 되겠는데 여자들끼리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은 막막함 자체였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그런 상황을 며느리들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 딸들아 고향으로 돌아가라 나는 늙어서 남편을 둘 수 없고, 내가 당장 남편을 두어 아들을 낳는다 해도 언제 그들과 결혼할 수 있겠냐.’ 나오미는 자신을 따라와 봐야 기대할 것이 없는 현실을 며느리들이 직시하도록 했습니다. 며느리들이라도 고향으로 가서 새로운 시작을 하도록 놓아주는 것은 나오미가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배려였던 것입니다. 나오미가 그렇게 말하자 며느리들은 울었고 두 며느리 중 오르바는 인사를 하고 모압으로 떠났습니다. 나오미가 곁에 남아있는 룻에게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고 권했지만 룻은 더 이상 자신을 보내려 하지 말라면서 시어머니를 따랐습니다.
나오미는 룻과 함께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나오미의 귀향 소식에 온 성읍에 말들이 많았습니다. 19절을 보면 사람들이 ‘이 사람이 나오미냐’라고 물었을 때 나오미는 자신을 희락이라는 뜻의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쓰디쓴 괴로움이라는 뜻의 ‘마라’라고 부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오미는 하나님이 자신을 벌하셨고 괴롭게 하셨다고 자기반성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룻과 나오미는 보리추수가 시작될 때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8절에서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보내려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한다.’라고 하나님을 은혜를 기대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11절에서 13절의 내용에서는 자신에게 소망이 없다고, 여호와께서 자신을 치셨다고 말합니다. 또 20절, 21절에서도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고, 여호와께서 비어 돌아오게 하셨고, 여호와께서 징계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고 말하면서 깊은 낙심에 빠져있음을 드러냈습니다.
반면 룻은 어떻습니까? 룻은 나오미가 낙심에 빠진 그 상황에 동행하는 것을 일부러 선택합니다. 시어머니야 혈육이 다 죽었고 더 이상 모압에 머물 수 없으니 수치를 안고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이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가지 않아도 됩니다. 룻이 이기적으로 생각했다면 시아버지도 죽었고 남편도 죽었는데 자식도 없는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시어머니에게 묶일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어머니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떠날 기회를 준 것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나를 따라오지 말고 자기 길로 가라고 진심을 담아서 강하게, 수차례 반복해서 권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떠난 오르바처럼 룻도 그렇게 떠날 수 있었습니다. 사사시대의 영적분위기에 맞게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자신도 가고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시고, 어머니가 묻히는 곳에 자신도 묻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룻은 ‘자신이 죽는 일 외에 다른 일로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벌을 내리시길 원한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룻은 인간적으로 더 행복할 가능성이 있는 새 출발의 기회가 있었고, 또 그 길로 갈 수 있도록 모든 상황이 허락되었는데도 그것을 선택하지 않고 나오미와 나오미의 백성과 나오미의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시어미니에 대한 정, 동병상련의 애틋하고 안쓰러운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물론 그런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룻이 모압에 있을 때부터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들었을 수도 있고,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정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나오미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미성숙한 신앙의 상태가 룻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게 되는 일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지는 의문스럽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한 사람의 신앙을 움직여 가실 수 있습니다.
노아처럼, 여리고성의 라합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기 어려운 어두운 조건 속에서도 비밀스럽게 신실한 사람들을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룻은 나오미와 함께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섬기지 않고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해가는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일을 나오미와 룻을 통해 진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룻은 자신이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큰 계획을 알고 나오미를 따라 간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당사자들은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담긴 자신들의 인생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나오미는 그런 놀라운 은혜의 통로인 룻이 곁에 있었지만 위로를 얻지 못하고 베들레헴에 도착해서 죽는 소리만 한 것입니다. 한 인간인 나오미는 고통스런 자기 경험 속에서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을 치셨다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한 것일 수도 있지만 불평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나오미의 모습이고, 욥의 모습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전체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한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묘한 섭리를 통해 나오미의 가정을 인도하셨습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모압에 간 일, 모압 여자를 며느리로 삼은 일, 가정의 남자들이 죽게 된 일, 베들레헴의 풍년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 일, 룻이 떠나지 않고 남은 일, 1장 마지막 절에 나온대로 보리추수가 시작될 때 베들레헴에 도착하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절묘한 타이밍을 말하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룻기의 내용에서 우리는 그것을 계속 보게 될 것입니다.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한다.’(8절)라고 말했는데 하나님의 선하신 돌보심이 이미 나오미 자신에게 세심하게 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역시 나오미가 말한 것처럼 많은 것을 잃어 텅 빈 상태가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이 징벌하시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고, 쓰디쓴 괴로움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오미와 별다를 바 없이 힘들어 하고,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우리 수준에서 정직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든 것을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선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일들을 위해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사용되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의 그 고생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 자신들은 그 때 몰랐지만 룻기가 기록된 훗날에 후손들이 알게 되었고, 우리가 알게 된 것처럼, 우리 인생의 의미도 우리는 다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 알게 될 부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살아계실 때는 몰랐다가 나중에 그분의 의미와 자신들의 의미를 알게 된 것처럼 우리도 가려진 시간 속에서 살며 쓰임 받다가 나중에 의미를 알게 될 부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우리를 선하게 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넓게 열려 있을지라도 룻처럼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영리 목적으로 설교를 스크랩, 캡처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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