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기독교가 존재하는 이유 (행 1장)

따뜻한 진리 2016. 7. 10. 23:32

사도행전 1:1-2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사도바울과 동행했던 의사였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술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별개의 책이 아니라 연결되는 한 권의 책으로써 누가복음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신 것으로 시작해서 죽음과 부활 승천까지를 기록한다면 사도행전은 그 이후에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람들을 통해 여전히 일하고 계신 것을 연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복음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초대교회에 일어난 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엔 성령께서 개인과 공동체에 구속사역을 실제적으로 나타내시는 일, 초대교회의 모범과 헌신, 복음을 증거하는 설교들, 시련과 핍박 등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복음에 대한 열정과 전도와 선교에 대한 자극을 줍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그런 효과를 얻기 위해 사도행전의 내용들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사도행전은 우리가 복음을 위해 도전과 헌신을 행하도록 동기부여 하기도 하지만 그런 행함을 강조하기 이전에 무엇 때문에 죄인이 제자가 되어 그런 헌신을 하게 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는지, 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이루는지, 왜 목숨을 바쳐 복음을 전하게 되는지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기독교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믿음이 무엇인지, 교회는 무엇인지 등을 말해줍니다. 실제 일어난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그런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교회에 질문을 던집니다. 그 질문이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남다른 선행 때문에 긍정적인 동기에서 생겨나면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에 교회 밖 사람들은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드러내는 수치스런 죄들로 인해 교회에 부정적인 질문을 합니다. 교회가 과연 존재할 필요가 있는가? 기독교인들이 가진 믿음이란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허황된 것이 아닌가? 기독교인들이 바라는 구원은 탐욕이 아닌가? 이런 질문들은 단지 교회 밖 세상 사람들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 가운데서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해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자세들을 갖게 하고,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그런 의문, 불신, 핍박은 언제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신자 자신과 교회가 가진 불완전한 모습 속에는 기운 빠지게 할 만한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의 시대 역시 이제 막 생겨나기 시작한 그리스도교에도 내부적 문제가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의문과 핍박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했던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를 핍박했고, 로마 역시 핍박했습니다. 어느 시대이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전하는 것은 세상에 대해 설득력이 없는, 어리석어 보이는, 인간으로서는 자랑할만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현실을 언제나 알고 계십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사도행전 당시의 기독교는 일종의 신흥종교였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이단 취급을 받는, 섣불리 발을 들여놓기 두려운 소수의 종교였습니다. 게다가 온갖 핍박까지 받는 상황 속에서 누가는 데오빌로라는 이제 막 신앙이 생기기 시작한 사람에게 누가복음에 이어 사도행전을 통해 믿음을 견고하게 세워주었던 것입니다. 누가는 데오빌로가 기독교가 왜 존재하는지를 깨닫도록 말해줍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사람들이 의지할 곳이 필요해서도 아니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헛된 소문에 속아 기독교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조직적인 강요로 인해 믿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의 동기나 필요와 조작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는 기독교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3절을 보면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서 사십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을 뿐 아니라 여전히 살아계셔서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불러 모으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라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가 사람의 주도적인 깨달음과 행동으로 시작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이 땅에 계신 예수님에게서 배웠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고, 그분이 승천하신 후에도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믿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새로운 일을 할 수 없었고, 그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성령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또 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가시적인 자기 나라의 회복을 기대하고 그 성취를 예수님께 물었지만 예수님은 대답을 거절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달린 것이니 너희가 알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오직 내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어떤 단체를 만들어서 윤리, 평화, 복지, 정의를 성취하거나,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는 감동적인 캠페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자신을 전하는 증인, 내 증인이 되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저 예수님 자신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시작에 있어서 사람의 깨달음과 사람의 의지와 사람의 준비됨과 사람의 비전을 막으시고 사람에게 없는 것들로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그저 예수님 자신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자신의 권위와 능력으로 자기 제자들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가룟 유다의 죽음으로 비어있는 자리를 채우는 과정에서도 강조된 것은 주님께서 맛디아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잘 아는 사울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없어져야 하는 종교라고 생각하며 핍박했던 사울이라는 사람도 주님께서 자기 증인이 되게 바꾸셨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철저히 의지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행하든지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예수님 자체입니다. 기독교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구속주이신,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신 예수님이 분명 살아계시기 때문에 기독교가 생겨난 것이고, 그분이 자신의 권위로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고, 성도와 교회에 능력도 주시기 때문에 기독교가 존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에 의해 여전히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사도행전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가 어떠하든, 한국교회가 어떠하든, 세상으로부터 교회가 어떤 평가를 받든, 우리 주님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은 멈추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살피면서 그것을 볼 뿐 아니라 이 시대 속에서도 목격하길 원합니다. 영리 목적으로 설교를 스크랩, 캡처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