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13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이스라엘은 7대 절기가 있고, 그 중 3대 절기 때는 각 곳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야 했습니다. 그 3대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고, 오순절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과 가나안 땅에서의 수확을 기념하는 절기이고, 초막절은 40년간의 광야생활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 중 오늘 본문에는 오순절이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오순절은 50일을 의미하는 데, 보리 추수 때 보리단을 바친 날로부터 7주 후, 즉 49일 후 밀을 수확하는 때 오순절을 지내게 됩니다.
이 오순절에 원근각지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과 유대교를 믿는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입니다. 9절과 10절을 보면 그들이 온 지역들이 나타나는데, 그 중에는 예루살렘에서 수백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먼 지역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먼 곳까지 흩어져 살게 된 이유는 구약시대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망할 때, 또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망할 때 포로로 끌려가 여러 곳으로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점령당한 나라의 백성들을 포로로 끌어가 여러 지역에 흩어 놓음으로써 반역을 도모하거나 재건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먼 곳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루살렘 토박이 성도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들이 여러 종류의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방언의 종류들은 바로 오순절을 지키려고 여러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해외동포와 같은 그들이 보기에 분명 방언을 한 자들은 이스라엘 본토에 사는 자들이고, 다른 지역의 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인데, 입에서는 각자 다양한 외국어들을(여러 곳에서 모인 그 재외유대인들의 언어)하고 있었으니 놀랐던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다.”라고 말한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술 취한 것이라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본문에서의 방언은 분명한 언어였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분명한 의미가 있는 단어들이 나열된 문장의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방언을 한 자신들은 그 말을 하면서도 무슨 뜻인지 몰랐을 것이고, 원해서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로 볼 때 방언의 목적은 방언을 하는 자신의 종교적 성취감이나 자기 신비화나 신앙생활의 활력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언을 듣는 자들의 구원의 유익을 위한 언어였고, 외국어였습니다.
방언은 제자들과 120명의 성도들이 의도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들이 그것을 의도했다 한들 자신들의 능력으로 그런 다양한 언어들을 구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평생 동안 자기 지역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던 그들이 무슨 어학책이나 원어민 강사가 있어서 그런 언어를 구사했겠습니까? 설사 그런 방법이 있어다 한들, 기초적인 회화수준도 아닌 11절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큰 일”이라는 자기 모국어로도 표현하기 힘든 내용을 다양한 외국어로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니 그들의 방언이라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이 오순절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할 계기를 스스로 마련한 것도 아니고, 그런 방언을 하나님께 달라고 구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 오순절 사건이 철저히 하나님의 역사임을 증명하는 또 다른 요소는 그 방언을 들은 자들에게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모였던 방문객들이 그 방언을 한 사람들, 즉 제자들과 약 120명의 성도들을 어떻게 여겼습니까? 7절을 보면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라고 말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말은 그저 출신 지역을 설명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46에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라고 말했는데, 이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의 한 동네입니다. 그만큼 당시에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은 일종의 관용어구로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무시와 조롱이 담겨 있는 말이었습니다. 본문 13절에서 그것이 재확인되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술 취했다면서 조롱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천박한 사람들의 입에서 자기 지역의 언어가 나왔다는 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떤 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부인하기 위해 그들이 술 취한 것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당황케 되는 일로 그들에게 복음 들을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인간적인 뭔가가 무너지게 하셔서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첫 전도와 확장에서 하나님께서 방언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셨다는 것은 인간의 언어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같은 말을 사용해도 진정한 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언어 뿐 아니라 복음 전달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잘 전하려고 해도, 듣는 자가 아무리 이해력이 좋아도 복음이 단순한 인간의 언어로 전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말로 끊임없이 구원의 말씀을 하셔도 듣지 않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죄인의 상태를 인간 역사가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언어 전달이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께서 일하셔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19-20절에서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성령께서 말하는 자들을 주관하시고, 듣는 자들도 움직이셔야 합니다. 본문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기독교는 인간적인 매력을 갖춤으로써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초대교회의 첫 시작에서 일어난 사건은 인간적인 매력은커녕 무시당하고, 설득력 없는 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하나님의 큰 일을 듣게 된 것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어떤 탁월함, 인간적인 방법, 마음을 구슬리는 말이 아닌 사람이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복음 전할 기회를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시길 원합니다. 또 복음 전하는 일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경을 읽을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시고, 감동을 주셔서 우리의 고정관념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큰 일을 경험하는 일들이 항상 있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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