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4-36 김영제 목사(하늘기쁨교회)
오순절 성령강림에 의해 놀라고 당황한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설교를 했습니다. 그 설교의 주제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갑작스럽게 뜬금없이 일어난 황당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오래 전에 계획하신 일을 위한 징조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 중 먼저 16절부터 나오는 요엘의 예언은 세상의 종말과 그 징조로서의 방언을 증명하고 25절부터 나오는 다윗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예고된 것임을 증명합니다.
베드로는 설교 시작에서 먼저 방언이 술취함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라고 반박합니다. 15절에서 ‘때가 제 삼시’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오전 9시를 말합니다. 그 시간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던 시간이었고, 특별히 명절에는 그 시간까지 음식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술처럼 사람의 어떤 갑작스런 행동을 일으킬 만한 것이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순절 사건을 선지자 요엘의 예언과 연결합니다.
요엘은 말세, 즉 심판 날에 앞서 하나님께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이 예언하고 환상을 볼 것을 예고했습니다. 19-20절을 보면 하늘에서는 기사, 땅에서는 징조가 있을 것이고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런 요엘의 예언을 인용했다는 것은 말세가 가까움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과 신약교회의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과 종말이 곧 닥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때로부터 지금까지 세상의 종말과 심판이 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사도들과 베드로가 종말의 때가 임박한 것으로 생각하고 본문의 설교 내용처럼 복음을 긴급하게 전했던 것은 실수였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종말의 때가 임박한 것을 느끼면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복음을 받아들여 믿는 자들도 심판이 임박함을 느끼는 가운데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종말은 임박해있습니다.
세상의 역사가 끝이 나는 것도 종말이지만 모든 개인의 죽음도 종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8-90년을 살아도 그 인생동안 복음을 들을 기회가 몇 번 없습니다. 그 조차도 거절합니다. 그렇게 구원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죄의 탐욕으로 시간을 헛되게 낭비하기에 인생은 허무하게 짧은 것입니다. 심판에 의해 천국과 지옥으로 갈려 그 상태가 영원하게 지속될 것에 비하면 출생에서 죽음까지의 삶은 순간에 가까운 것입니다. 또 초대교회 성도들 이래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려온 이천년 역사도 순간일 뿐입니다. 그래서 말세의 심판 때는 누구에게나 곧 임박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언과 환상을 부으시고, 그리고 천재지변들을 일으키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도하시는 무엇입니까? 아직은 맘대로 살아도 되는 여유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우리에게 각성을 주는 것입니다. 요엘서가 그것을 말하듯 마찬가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충격을 주고 중요한 질문에 직면하도록 만드신 것이라고 베드로가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말하면서 그 심판에서 구원받기 위해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불러야 할 그 주님은 누구입니까? 바로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님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분을 죽인 것입니다. 구원자를 죽였으니 모든 일을 망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예수님의 구원자로서의 권한을 위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써 베드로는 다윗의 예언을 언급한 것입니다. 25절부터 29절은 시편 16편의 내용인데 다윗이 마치 자기 이야기를 하는 듯 부활에 대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부활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29절에서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무덤이 우리가 아는 곳에 있지 않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예언한 부활에 관한 내용은 다윗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가 예언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설교를 통해 두려운 심판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을 유대인들이 알게 했고, 그 심판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했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들의 무지와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분이심을 알게 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그것을 보증한다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부활하신 주님의 보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요엘서에 나타나듯 성부께서 약속하신 것이고, 성자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자신이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수차례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33절).
이렇게 누구보다 성경 계시에 익숙했던 유대인들조차 구원을 위해서는 복음을 바르게 설명해주는 베드로의 설교를 들어야 했습니다. 사도들과 베드로는 그렇게 유대인들이 성령의 역사를 순간 목격하며 체험한 것으로 충분하게 여기지 않고, 성경말씀을 근거로 설명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베드로가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21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단지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부르면 구원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순간의 뜨거운 체험과 고백이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인격적인 이해와 돌이킴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구원하실 자라면 그 사람은 이 짧은 인생의 시간 속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경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될 것이고, 성경에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풍성히 깨닫게 될 것이고, 죄인인 자신을 알게 될 것이고, 그런 자신에게 한없는 은혜로 베풀어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겸손히 의지할 것입니다. 구원은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기 직전 몇 달 전, 혹은 며칠 전이 되서야 징조를 주시지 않고 ‘우리가 기다렸는데 왜 이렇게 안 오시는가!’ 할 만큼의 시간을 남겨두셨으면서도 임박한 분위기를 조성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단순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켜지는 것처럼 즉각적이고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 기회를 잃을 수 있는 임박한 말세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순간의 체험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하나님의 큰일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고 우리 자신에 대해 정직하게 절망하고 주님을 의존해야만 주님을 부르는 일이 구원과 연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을 위해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여유롭지 못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짧습니다. 우리 자신을 구원의 은혜로 견고하게 다지는 일에 있어서도 그렇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기회도 그리 넉넉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긴장 속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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